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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노트

철학자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 밑줄 긋기

by 이야기캐는광부 2015.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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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이미지 출처 : 문학과 지성사 홈페이지



책 제목이 관능적이다. 다홍빛 표지도 잘 어울린다.


'에로스의 종말'을 읽었다. 어렵다. 곱씹어서 읽어야 할 책이다. 일단 밑줄 남기고 도망가야지. 책을 읽었지만 읽지 못했다. 읽은 척 하느라 밑줄 남기고 도망가는 것이다.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는 엄청난 강제를 낳으며 성과주체를 심각하게 망가뜨린다. 성과주체는 자가 발전된 강제를 자유라고 여기며, 강제를 강제로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자신의 강제 구조를 개개인이 누리고 있는 가상의 자유 뒤로 숨긴다. 그 속에서 개개인은 스스로를 더이상 예속된 주체가 아니라 기획하는 프로젝트로 이해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간계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빚을 탕감받고 속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로써 채무의 위기뿐만 아니라 보상의 위기까지 발생한다.

-31쪽-


채무의 탕감도, 보상도 모두 타자를 전제한다. 따라서 타자와의 유대가 없다는 사실이 바로 보상의 위기와 채무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초월적 조건을 이룬다. 이러한 위기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널리 퍼져 있는 견해(예컨대 발터 벤야민의 견해)와는 반대로 자본주의가 종교일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죄(채무)와 죄사함(채무 면제)의 메커니즘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죄(채무)를 만들기만 할 뿐이다. 자본주의에는 속죄의 가능성, 채무자를 채무에서 해방시켜줄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속죄할 수 없다는 것은 성과주체를 우울증에 빠뜨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소진증후군과 더불어 할 수 있음이 초래하는 구제할 수 없는 좌절이며, 다시 말해 심리적 파산 상태를 드러내는 질병이다. 파산이란 말 그대로 채무 상환이 불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32쪽-


애무는 "달아나는 것과의 놀이,"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찾아가는 행위다. 애무의 갈망은 아직 오지 않는 것을 양분으로 하여 자라난다. 쾌락의 강렬함 역시 감각의 공유 속에서도 타자가 부재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오늘날 사랑은 욕구, 만족, 향락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에 타자의 결핍이나 지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검색 엔진이자 소비 엔진으로서의 사회는 찾을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소비할 수 없는 부재자를 향한 모든 갈망을 폐기한다. 그러나 에로스가 깨어나는 것은 "타자를 주면서 동시에 빼았는" 얼굴들에 직면할 때이다. 페이스는 포르노처럼 발가벗겨진 채 전시되는 상품이며, 시선에 완전히 노출되고 남김없이 소비된다.

-47~48쪽-


사랑은 피치노에 따르면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이다. 그것인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바로 이러한 변신과 상처가 사랑의 부정적 본질을 이룬다. 하지만 오늘날 사랑이 점점 더 긍정화되고 길들여짐에 따라 사랑의 부정성도 희귀해져간다.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할 따름이다.

-51쪽-


자본주의는 벌거벗은 삶을 절대화한다. 좋은 삶은 자본주의의 목표가 아니다. 축적과 성장을 향한 자본주의의 강박은 바로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에서 죽음은 절대적 손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순수한 영리 행위는 좋은 삶이 아니라 단순히 삶 자체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비도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영리를 가정 관리의 과업이라고 여기고, 화폐 자산을 잘 보존하든가 무한히 증식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줄기차게 옹호한다. 이러한 신념의 기반은 부지런히 삶을 돌보려는 노력이지만, 그것은 좋은 삶을 위한 노력은 아니다." 자본과 생산의 운동은 좋은 삶을 목표로 하는 이념을 떨쳐버림으로써 무한한 가속화 과정에 빠진다. 방향을 상실한 운동은 극단적으로 가속화된다. 이로써 자본주의는 노골적이고 파렴치해진다.

-55쪽-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57쪽-


우울한 나르시시즘적인 주제는 어떤 결론도 맺지 못한다. 하지만 결론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흘러가고 떠내려가버릴 것이다. 우울증의 주체가 안정된 자아상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유부단함, 결단력의 결핍이 우울증의 전형적 증상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울증은 과도한 개방과 탈경계의 와중에서 끝맺음을 하고 완결지을 수 있는 능력이 실종되어버린 이 시대의 특징적 현상이다. 사람들은 삶을 완결지을 줄 모르기 때문에 죽는 법도 잊어버렸다. 성과주체 역시 결론을 맺지 못하고, 완결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는 더 많은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바스러진다.

-58쪽-


에로스적 삶의 충동은 나르시시즘적이고 상징적인 자아의 정체성을 흘러넘치고, 그것의 경계를 해체한다. 에로스적 삶의 충동은 그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죽음의 충동으로 표출된다. 벌거벗은 삶의 끝이 죽음의 전부는 아니다. '나'의 상상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도, '나'에게 사회적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징적 질서를 폐기하는 것도 죽음이며, 그러한 죽음은 어쩌면 벌거벗은 삶의 끝보다 더 심각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갈망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죽음의 근본적인 매혹이 작굥한다. 에로티즘의 핵심은 언제나 구성된 형태들의 해체다. 다시 말하면, 뚜렷하게 구분된 개별자의 불연속적 질서를 구성하는 사회적, 규칙적 형태들의 해체.

-61쪽-


하이데거가 인간의 거주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본 장소에는 본질적으로 "신적인 것"이 깃들어 있다. 역사, 기억, 정체성이 장소의 본질을 이룬다. 하지만 지나쳐버릴 뿐 머무르지 않는 관광의 "비-장소"에서는 그런것을 찾아볼 수 없다.

-68쪽-


예컨대 앙드레 브르통은 에로서에서 보편적 힘을 본다. "인간과 우주에 값하는 유일한 예술, 그를 별보다 더 멀리 이끌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은 (....) 에로티즘이다."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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