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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존재 이유를 깨닫게 해주는 책이자, 이 땅에 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사색하게 해준다.


도정일의 문학에세이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를 읽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문학평론. 어떻게 저런 깊이 있는 해석이 가능할까 감탄하게 되는 책이다. 시를 읽는 방법부터 한편의 시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철학, 우리 문학의 지향점, 문학교육의 필요성, 시적 수사기법…. 이 모든 것들이 구슬을 꿰어놓은 듯 한 권의 책에 담겨있다.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야 할 만큼 쉽지 않은 책이지만, 날카로운 언어로 문학의 속살을 과감하게 보여 준다. 


문학의 숲을 유랑하는 사람들에게 시와 문학을 해석하는 독법과 함께 문학의 숭고한 가치를 알려주는 이정표와 같은 책이다. 


"시의 질을 따지는 비평적 장치는 여러가지이다. 시적 진술의 평면성 극복 여부, 간접화의 정도와 효과, 이미지 배치법, 비유/상징 운용의 기술 수준, 어사 선택의 연마도, 긴장/갈등의 상승적 해소와 종합-이런 것은 그 장치의 일부이다. 이 점검 장치들을 들이대어 시를 읽는 이유는 한편의 시가 독자의 시간 소비를 요구할 만하 값어치를 지는가, 읽은 다음의 독자로 하여금 읽기 전의 자기와는 '달라진' 심미적 상승을 경험하게 하는가, 수면 위로 솟구쳐올랐을 때의 물고기 눈알 같은 진리의 한순간이 포착되고 이것이 독자의 내면에 울림을 일으키는가 않는가를 따져보기 위해서이다. 그 울림과 상승이 있을 때 우리는 시 읽기로부터 '즐거움'을 경험한다. 신경림의 시가 쓰러진것들을 노래하면서 읽는 이를 즐겁게 하는 까닭은 바로 그 같은 상승을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82쪽-



"시는 생략함으로써 유혹한다."

-164쪽-



"시적 담론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에로스의 독법이고 발견의 해석학이다. 시의 담론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시적 담론이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엉뚱한 것으로 '뒤바꾸어 말하기 때문에' 특별히 시적 담론이다. 이 감추기와 바꾸기, 생략과 응축, 위장과 간접화의 기술을 배제한다면 시의 존재는 결정적으로 훼손된다. 그 기술은 시의 담론을 시적 실천이게 하는 시의 생산력이다. 시는 '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좁게는 작품 차원에서, 넓게는 역사의 큰 문맥에서, 전체성을 지향하고 완결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시의 '서사적 성질'-곧 시의 '서사성'이다. 시적 서사성의 의미는 특정의 시가 그 텍스트의 표층에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않는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총체적 서사의 한 '부분'으로 그 서사의 완결을 지향하고 있는가 않는가의 문제이다. 인간의 총체적 서사란 프레데릭 제임슨의 헤겔적 표현을 빌리면 "필연에서 자유로"나아가려는 인간의 집단적 서사이다. 시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집단적 서사의 일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소설과 마찬가지로 '서사적'이다. 다만 시는 소설의 방법으로 총체 서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방법, 시의 방법으로 참여한다. 따라서 시의 읽기는 시 텍스트가 시적 담론의 방법으로 감추거나 결핍으로 남겨둔 전체성과 완결성에의 운동에 읽기 자체가 참여하는 일이다. 시와 마찬가지로 시의 읽기도 자유(완결)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다. 이 그리움을 에로스라고 한다면 그것에 의해 인도되는 시의 읽기는 에로서의 독법이다."

-164쩍~165쪽-


문학작품이 해외 독자의 독서시간을 점유하게 되기까지에는 세 개의 수준이 참여한다. 원작의 수준, 번역의 수준, 유통의 수준이 그것이다. 이 세 차원이 문학 경쟁력의 조건이며 이들 조건의 충족도와 충족 능력이 경쟁력을 결정한다. 경쟁은 아무때나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가지 경쟁 조건을 만족시킬 능력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들 각 수준에서의 능력을 따지는 데도 어떤 작품이 왜 좋은가라는 비평적 평가가 작동하고, 번역의 질을 따지는 데는 번역자의 언어능력과 문학적 능력(문학작품의 번역은 작문이 아니다)이 동시에 문제되며, 유통의 수준에서는 현지에서의 상업적 출판과 배포, 대중적 수용과 비푱적 수용의 정도가 문제된다. 문학작품의 성공적 대외진출이 어려운 것은 이들 세 조전을 만족시킬 능력의 동시적 삼박자 구비가 쉬운 일이 아니기때문이다. 그 세가지 조건의 충족 능력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수준 미달이면 다른 두 차원에서의 노력과 능력은 낭비되고 만다."

-257쪽~258쪽-



"문학교육의 인문교육적 목표는 인간이 자기 시야에서 '인간'을 상실하지 않게 하는 데 있다. 오늘날 이 목표는 인간이 자연과의 전체적 관계를 회복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생명의 전체성이라는 가치가 다시 문학교육의 중심적 테마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문학의 오랜 전통 속에 살아있는 그 테마는 전체를 위해 부분이 희생되어도 좋은 전체주의적 전체성이 아니며 부분이 전체를 대체하는 물신주의도 아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그것은 전체가 부분에 봉사하고 부분이 전체를 지탱하는 관계로서의 전체성이다. 테마로서의 이 전체성은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존재방식에 관한 문학의 가장 오래된 주제 가운데 하나이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한 적대성이 주목되면서부터는 가장 현대적인 문학적 주제의 하나가 되었다."



"정서교육으로서의 문학교육의 목표는 생명에 대한 외경과 생명현상의 전체적 관계에 대한 감성을 기르게 하는 것이다. 이 목표는 자연 멸시의 패러다임을 교정한다. 예술적 감성은 예술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감성은 '존재의 대상화'에 대한 정서적 저항이고 그 대상의 '도구화와 파편화'에 대한 거부이다. 문학은 이를테면 의인화, 알레고리, 감성 이입 등의 방법으로 모든 객체 대상들을 주체로 바꿀 수 있다. 문법적적으로 말하면 이 방법들은 언제나 목적어의 위치에 있어야 하는 벙어리 대상들에게 생명과 언어를 부여하여 주어의 위치에 서게 한다. 근대적 문명의 패러다임 속에서 자연은 언제나 도구화한 객체이고, 추구, 착취, 소유, 조작의 대상이다. 이 객체와 대상으로서의 자연은 그 자체의 권리와 품위, 그 자체의 생명과 언어를 갖지 못한다. 감성교육으로서의 문학은 예컨대 '개구리가 말하기를' 또는 '나무가 그러는데'라는 어법으로 모든 자연 대상들을 대상의 자리에서 주체의 자리로 옮겨놓음으로써 그것들에 감성을 부여하고 이 방식으로 인간의 감성자체를 강화한다. 대상의 위치 이동은 단순환 동화적 감정 이입 장치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에 인식 위치의 이동이고 세계관의 관점의 이동이다. 이 이동은 인간으로 하여금 타자와 타자적 존재의 고귀함을 알게 하고 그것의 관점, 가치, 언어를 배우게 한다. 문학교육은 문학의 여러 장치들이 지닌 이 같은 힘과 기능에 충분히 주목하고 그것들을 감성교육의 장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

-382쪽~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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