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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범신이 장편소설<유리-어느 아나키스트의 맨발에 관한 전설>로 돌아왔다. 이 작품은 지난해 3월부터 7월까지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된 후 최근 출간됐다.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굵직한 사건들과 호홉하면서 주인공 '유리'는 방랑의 여정을 떠난다. 친일파였던 큰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이고 방랑의 길을 떠난 유리. 그가 쏜 총알은 우리 역사의 비극적인 단면을 처절하게 관통하며 피를 묻힌다.


이 작품은 딱딱한 역사소설이 아닌 흥미진진한 판타지 소설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소설에는 작가가 새롭게 이름을 붙인 나라들이 등장한다. 수로국(한국), 화로국(일본), 대지국(중국), 풍류국(대만) 이 그 예다. 이 4개 나라의 역사와 유리의 삶이 톱니바퀴처럼 얽혀며 580여쪽에 이르는 소설의 서사는 끝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간다. 


주인공 '유리'는 제도와 억압에 눌리기보다는 단독자로서의 자유를 갈망하는 인물이라는 느낌이 든다. 혀가 길고 동물들과 대화를 할 줄 아는 유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의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지나간다. 우리 안에도 그런 '유리'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 소설속 문장을 곱씹으면 그 생각이 더욱 명료해질 것이다.



타인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자유를 계속 확장하는 것, 이것이 자유의 유일한 법칙이다.

-123쪽-


역사이래, 수많은 죄 없는 이들이 단지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어 살림터에 쫓겨나왔다. 우리는 더 이상 내쫓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제일의 맹세는 반유리, 반걸식食이다. 첫째, 더 이상 떠돌지 않을 것이고, 다시 첫째, 우리는 더이상 얻어먹지 않을 것이다. 무릇 모든 인간은 머물러 살 권리가 있고 제 먹이를 스스로 구할 자유가 있다. 머물러 살 집과 터가 우리의 유일한 자산이고 스스로 마련한 먹을거리가 우리의 고귀한 목숨이다. 이걸 지키는 일이 유일한 도덕, 유일한 양심, 유일한 윤리라는 걸 우리는 굳게 믿는다. 이에 다시 다짐하거니와 우리는 더 이상 떠돌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빌어먹지 않을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유리걸식하지 않을 것이다.

-142~143쪽-


누가 신분에 대해 물으면 유리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유리離. 길에서 태어나 길로 흐르는 사람이오."

-195쪽-


혀는 근육의 덩어리였다.


뿌리는 목뿔뼈에 부착되어 있고, 혀끝은 안과 밖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데 길이가 보통 십 센티미터 전후였다. 그러나 유리의 혀는 그 보다 두 배 이상 가늘고 길게 늘어났다. 혀를 넓고 평평하게 만드는 수직근과 좁고 길게 만드는 가로근이 특별히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로근육에 힘을 주면 혀는 강력한 수축을 통해 좁아지면서 앞으로 쭉 밀려나가 위로 솟았다. 화살 끝이 느린 그림으로 허공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은 이미지였다.

-203쪽-


당파를 이루면 이념을 앞세워 제도를 만들고 제도는 사람의 영혼과 삶을 가두고 옥죄기 마련이었다. 유리는 이념적 체계와 제도에게 소속되는 게 삶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길이라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헛소리에 불과했다. 지배자가 되는 것도, 피지배자가 되는 것도 유리는 싫었다. 할 수 있다면 사람을 당파적인 체계 안에 편입시켜 지배하려는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싶기도 했다. 화인국 천황을 죽이고 장제스를 죽이고 마오쩌둥을 죽이고 하느님과 부처까지 죽이고 싶었다. 그들이 지어내는 명목과 체계는 존재의 고유성을 오직 그들에게 복속시키려는 허울로서 작용할 뿐이라는 게 그 무렵 유리의 생각이었다. 걸식에게 보여준 마오쩌둥의 교시 역시 당파주의에 따른 반인간적 폐해를 보여주는 징표의 하나였다. 대지국의 혁명을 통해 수로국의 독립을 추구한다는 논리도 그 범주안에 들어 있었다. 그런 단순 논리야말로 오히려 싸구려 감상이었다.

-253~254쪽-



나의 할아버지는 이어 말씀하셨다.


"젊은 날.....무엇을 찾아 그리 떠돌았었는냐고 묻진 마라. 돌아보면.....나는 아무것도.....찾지 못했다. 만주에서......대지국 곳곳에서......풍류국에서........텐산 산맥, 티베트, 아라비아 고원에서,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을.....나는 그전부터.....본래부터....그러니까 말하자면....자유를.....원래 갖고 태어났다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긴 했다만....후회는 없다. 그 무엇에도 소속되지 않은...세월이었다고 느끼니까. 나부끼는 바람에게만 오직......소속되어 살았다고 할까. 어떤 필연.....어떤 우연에도 속박되지 않는."

-573쪽-



지도 뒷면에 쓴 할아버지의 마지막 편지를 나는 읽었다.


"네가 길을 찾았다니 다행이다. 길을 찾았다면, 그래서 끝까지 그 길을 가고자 한다면 너는 이미 자신의 주검을 이미 본 셈이다. 그러니 너 또한 앞으론 두렵지 않을 게야. 나 때문에 슬퍼할 건 없다. 나는 존재 자체를 뛰어넘는 길로 가고 싶다. 거의 평생 단독자로 살았다만, 그 역시 주체라는 허울에 감싸인 에고의 감옥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회색분자'라고 나를 비난하던 걸식 형님의 말을 생각해본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 있는 말이 그것이야. 그러나 걸식 형님도 알 것이다. 우리 앞엔 여전히 혁명은 남아 있다는 것. 가는 길은 다를지라도 애야, 한순간도 내가 그것의 완성을 굼꾸지 않은 적은 없었다. 늘 파괴의 신 '시바'가 되고 싶었었지. 앞으로도 그럴테고."

-5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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