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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연구/창작노트

검은 비닐봉지는 의외로 훌륭하다

by 이야기캐는광부 2010.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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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제가 월간샘터 7월호에 투고한 글입니다.


현재 고시원에서 살고 있는 저는 검은 비닐봉지가 참 좋습니다. 아니 이젠 정이 들어 버렸죠. 녀석은 빛이 잘 들지 않는 고시원 제 방 문고리에, 배불뚝이 검은 박쥐처럼 하루 종일 매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문고리에 매달려 있는 것일까요? 그건 이 녀석을 쓰레기통으로 재활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시원 제 방에는요. 요녀석이 박쥐처럼 매달려 있습니다.


바로 검은 비닐봉지!!!

제 방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쓰레기가 그 녀석 배안으로 들어가거든요.
콜라 캔, 과자봉지, 기차 영수증. 헤어왁스 통, 짜파게티 봉지, 나무젓가락 껍질, A4용지 구긴 것, 손톱, 발톱, 편의점 영수증, 또 다른 비닐봉지, 김밥을 싼 은박지, 이쑤시개, 머리카락, 껌 종이 등등.

물론 24시간 매달아 놓아서 미안한 감정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쯤 ‘동네 슈퍼 카운터에 편하게 누워 있던 시절이 좋았지’하며 울먹이고 있을 겁니다. 그럴 때면 이렇게 위로해 주곤 한답니다.

‘비닐봉지야! 좁아터진 내 방을 생각한다면, 공중에 매달려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게 해주는 쓰레기통으로서의 네 삶은 충분히 값지다‘라고 말이죠.
그래도 뾰로통하게 통통한 배를 내밀고 있는 녀석에게 옛날이야기 하나를 더 들려줍니다.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건 아주 오래전부터야. 어린 시절, 어머니는 일주일에 여러 번 커다란 검은색 비닐봉지 하나(아마도 너의 할아버지뻘 되시는 분)를 들고 오셨어. 내가 좋아하는 과자, 음료수,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 오셨던 거지.
그럴 때면 무척 설레었어. 잠자고 있다가도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번쩍 번쩍 깼지. 오늘은 봉지 안에 어떤 맛있는 걸 사 오셨을까하고 기대감에 부풀었거든! 그래서 너만이 낼 수 있는 ‘부스럭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참 좋았어.’라고 말이지요.

저는 이렇듯 어머니의 오른 손에 들려있던 검은 비닐봉지가 좋았습니다. 때로는 건담 로봇이나 게임기보다도 가슴을 뛰게 만들었지요. 어머니께서 현관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비닐봉지만 낚아채서 들여다본 적도 수십 번입니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재빨리 낚아채듯, 그렇게 비닐봉지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죠. 이렇게 검은 비닐봉지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하나를 소중히 머금고 있답니다.

지금도 방한구석에 검은 비닐봉지가 놓여있다면 왠지 다가가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과연 뭐가 들었을까하고 말이지요. 녀석은 직접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그 속을 누구에게도 잘 보이지 않는 신비스런 면이 있습니다. 그 속을 제게 말해주지 않지만, 묵묵히 문고리에 매달려 쓰레기통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녀석이 대견합니다.

한번 쓰고 버릴 수 있는 비닐봉지지만, 녀석만큼은 차마 버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녁 12시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와 방문을 열면 녀석이 대롱대롱 흔들리며 반겨줍니다.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진 못하지만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녀석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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