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741)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 좌파, 우파
‘넓은 의미의 정치’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권력을 이용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모든 상호작용을 뜻한다. 평소에는 이렇게 쓰일 때가 많다. “최 부장 승진한 거 봤지? 이 회사는 일 못해도 정치만 잘하면 다 된다니까.” 진부하게 들리지만, 이렇듯 일상에서 넓은 정치는 ‘본질적인 기능과 실력 대신 힘의 논리를 활용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지만 ‘정치적인 감각’처럼 다른 단어와 함께 쓰면 부정적 인상이 한결 누그러진다. 사실 넓은 정치의 의미를 좀 더 넓게 확장하면 대인관계 전반에 필요한 센스까지 포괄할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과 여론이 모이면 하나의 권력과 비슷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감각에 속한다.
‘좁은 의미의 정치’는 정부와 지지정당에 대해 이야기할 때 쓰인다. “아무리 편한 자리에서도 정치랑 종교 얘기는 하지 마라.”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조언을 하는 사람이 앞서 언급한, 승진한 최 부장 얘기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보통 이런 조언이 넓은 정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지지정당이나 정권에 대한 이야기는 입장이 다를 경우 껄끄러워지기 쉬우니 아예 대화 주제로 꺼내지 말라는 뜻이다. 정치가, 한쪽이 당선되면 다른 쪽은 패배자가 되어버리는 승자 독식 게임으로 여겨질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좁은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잘 나누려면 각자가 선호하는 인물이나 정당 자체보다는 추구하는 정책과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조건들을 이해하고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통은 그렇지 못하니 좁은 정치에 대한 대화가 매끄럽기는 어렵다. (물론 최 부장 뒷담화도 안 하는 게 좋다.)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 권성민 - 밀리의 서재
어쨌거나 좌파와 우파는 프랑스혁명 아래 탄생한 말이다. 200여 년 전의 개념이지만 동시대에도 유효한 맥락들이 많이 남아 있다. 지금도 학계에서 모두가 동의하는 하나의 정의가 있지는 않지만(그런 게 있으면 학계가 아니다.), 일부 해석의 차이가 있긴 해도 주로 정치경제의 문제, 즉 국가가 한 사회의 부를 다루는 방식을 두고 좌우를 나눈다. 우파는 자유로운 시장이 경제를 주도하고 정부는 최소한으로 개입하는 작은정부를 지향하고, 좌파는 복지와 재분배를 통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큰정부를 지향한다고 폭넓게 정의하는 데는 대체로 이견이 없다.
이 이야기를 하는데 가장 영향력 있고 요긴한 틀을 제공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다. 그는 1994년 출간된 저서 『좌파와 우파Destra e Sinistra』에서 좌우 개념을 크게 두 축으로 정리했는데, 그중 하나는 ‘평등-불평등’이다.13 보비오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기준은 평등에 대한 태도다. 좌파는 평등을 지향한다. 우파는 불평등을 지향한다고 말하면 좀 이상하고, 각자의 자유로운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불평등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한다고 본다. 이를 인정하고 감수하는 것이 우파의 사상적 전제다. 한편 좌파가 지향하는 평등 역시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똑같은 조건에 두겠다는 ‘획일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완전히 동등한 조건에 두려면 개인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억압해야 하기 때문이다. 좌파가 말하는 평등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되,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불평등에서 오는 고통을 줄여나가려는 지향이다. ‘아니다! 내가 아는 좌파는 획일적으로 똑같은 평등을 추구한다! 북한이나 중국을 봐라!’라는 반발이 떠올랐다면 여기서 보비오의 또 다른 축인 ‘자유주의-권위주의’를 참고하자. 이번에는 자유와 평등 중 ‘자유’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보비오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위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표했다.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 권성민 - 밀리의 서재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권위주의적으로 불평등을 유지하는 극우파는 논리적으로 성립하지만(그리고 당연히 현대 사회에는 이런 체제를 바라는 이는 없으리라 믿고 싶지만…….), 권위주의적으로 극단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극좌파는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권위주의는 강력한 권력을 전제하는데, 이는 극단적 평등이라는 지향과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공산국가들이 다 망했지.’라며 쉽게 혀를 찰 수 있는 대목이지만,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건강한 태도 중 하나는 지금 내가 문득 떠올린 생각을 당사자는 인생을 걸고 치열하게 고민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실험이었던 공산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사상가들은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끊임없이 도입했으나 권위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끝내 실패했다. 하지만 모든 실험은 실패했을 때에도 유산을 남긴다. 현대의 선진 국가들은 이 실험의 폐허에서 얻은 자산들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복지제도를 마련했다.
사실 보비오의 이 분류는 직관적인 통찰을 제공하지만 면밀히 들여다보면 모호한 면도 있다. 그가 말하는 권위주의는 사실상 자유주의의 대립 항으로 배치되었을 뿐 체제로서의 정당성을 고려한 것 같지는 않다. 이를 감안하면 결국 좌파와 우파 모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고 ‘좀 더’ 평등을 추구하느냐, ‘좀 더’ 불평등을 감수하느냐 하는 상대적 방향성의 문제가 된다. 이 둘을 가르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 한, 보비오의 분류는 직관적 통찰 이상의 쓰임새를 갖긴 어렵다.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 권성민 - 밀리의 서재
앞서 소개한 보비오의 논문에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등장한다. 보비오에 따르면 자유는 개인의 조건, 즉 한 사람의 상태에 대한 개념에 가까운 반면, 평등은 두 사람 이상의 관계를 다루는 개념이다. (물론 자유 역시 타인에 의해 훼손될 수 있으니 순수하게 독립적인 개념이라고 보기엔 한계가 있지만.) 가령 ‘A는 자유롭다.’라는 문장은 자연스럽게 성립하는 반면 ‘A는 평등하다.’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이 불가능하다. 평등은 반드시 A와 B 둘 이상의 존재 사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평등하다.”라는 문장은 겉으로는 평등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특권을 정당화하는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풍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평등’을 ‘자유’로 바꾸면 역설은 사라진다. “모든 동물은 자유롭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자유롭다.” 이 문장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된다.16 우리가 자유를 말할 때는 주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지만, 평등을 말할 때는 반드시 타인들과의 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커뮤니티」를 한창 기획하던 중 어느 정치부 기자 선배와 나눈 대화에서도 비슷한 고찰이 있었다. “민주주의의 두 축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하면 자유와 평등이잖아요. 대답하는 시점에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따라서 좌우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는 내 말에 선배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지. 근데 평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묘하게 시혜적인 뉘앙스를 풍긴다는 게 재밌지.” 그의 농담을 풀어보면 보통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있는 이들을 떠올리며 평등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평등이 실현될 때 자신이 직접 혜택을 볼 거라고는 잘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냉소적인 위트에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난다.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 권성민 - 밀리의 서재
하지만 정말 그러할까? 「더 커뮤니티」 1회에서 출연자 ‘하마’가 했던 인터뷰가 이 냉소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겠다. “저는 기본적으로 어떤 세상을 상상할 때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도 너무 불행하지 않은, 너무 두렵지 않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요. 내가 동성애자라면, 내가 장애인이라면, 내가 휠체어를 타는 사람이라면, 이런 가정을 했을 때 이 세상이 너무 두렵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그러니까 평등이 반드시 타인을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평등은 나를 포함한 모두의 자유를 확장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다.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 권성민 - 밀리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