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759) 내 집에서 나이들 수 있을까, 돌봄문제
멀고도 가까운 이야기. 바로 나도 늙는 다는 것이다. 40대가 넘어가니 몸이 이유없이 쑤신다. 너무 무리하게 운동하면 아프다.
아직 젊은 나이라고 하지만 늙어간다는 것을 조금씩 체감하고 있다. 물론 아직 젊은 사람이 무슨 소리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내 몸에서 느껴지는 늙음과 조금씩 싹트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다. 노후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하루 하루 늙어가시는 부모님을 돌보는 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머릿속으로 가끔씩 생각만하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떠오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요양시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노인이 추후 요양시설 생활에 적응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입니다. 2021년 박희옥 교수 연구팀이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노인 16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질병의 심각도 같은 요인은 의외로 적응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다. 반면 요양병원 입소를 사회적 낙인stigma으로 여기는 정도가 강할수록 적응에 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2022년 양영자 교수가 요양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도 입소 직후에 강한 불안감을 보이는 노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노인들은 왜 이토록 요양시설에 거부감을 느끼는 걸까요?
장소place는 단순히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게 ‘은평구 수색동’이란 서울 어딘가의 행정구역을 넘어 대학원생 시절의 기억과 감정이 응축된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의미와 상징성을 품은 장소가 있으며, 저마다 어떤 곳에 깊은 애착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를 ‘장소 애착’이라고 합니다(이은숙 교수가 처음으로 이 개념을 국내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 장소 애착은 ‘이 동네가 살기 좋다’는 만족감을 넘어, 그 장소가 나의 일부가 되고 내가 그 장소의 일부가 되는 깊은 유대감을 의미합니다.
오래 머무른 장소에는 다양한 의미와 상징이 켜켜이 쌓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어느 동네에 터를 잡아 아이들을 길러내고, 이웃들과 정을 쌓고, 가게와 골목 구석구석에 얽힌 이야기를 빼곡히 쌓아왔다면, 그 동네에는 삶의 총체가 녹아 있는 셈입니다. 그만큼 애착도 깊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런 장소에서 송두리째 뽑혀 갑자기 부정적인 인상만 가득한 낯선 장소로 옮겨진다면 어떨까요? 노인이 요양시설을 꺼리는 것은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가 아닙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를 떠나는 게 싫은 겁니다. 노쇠로 인해 예비력이 떨어지면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기가 훨씬 어려워집니다. 게다가 노인들이 떠밀리듯 다다른 ‘병원’은 애착을 키우긴커녕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조차 어려운 장소입니다.
<내 집에서 나이 들 수 있을까>, 박한슬 - 밀리의 서재
그런데 노쇠로 인한 기능장애는 엄밀히 말해 ‘치료’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노화를 질병으로 분류하고, 노화를 되돌리는 기술이 개발되는 날이 오겠죠.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노화로 인해 예비력이 떨어진 상태를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때 바로 ‘돌봄’이 필요해집니다. 상태가 악화하는 것을 막고 ADL이나 IADL을 비롯한 일상적인 기능을 보완할 활동을 제공하는 것이죠. 물론 고혈압, 당뇨병 등 노화에 수반되는 만성질환에 대해서는 적절한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고혈압 환자 모두가 입원 치료를 받지는 않듯이, 일상생활능력이 감소한 노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 비용과 자원이 훨씬 더 많이 투입되는 의료에 노인들을 위탁할 게 아니라, 노인이 일상생활을 적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돌봄이 필요합니다. 범주가 다른 거죠.
그럼에도 노인 대부분이 요양병원에 입원합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집에서 돌봄을 제공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과거에는 가족이 아픈 구성원을 돌보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고, 누구나 나이 들어 가족의 돌봄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2015년에 3세대 이상이 함께 사는 가구가 100만 가구 정도였던 반면, 2024년에는 그 수가 39.5% 감소해 약 60만 5,000가구에 불과합니다.
<내 집에서 나이 들 수 있을까>, 박한슬 - 밀리의 서재
병원은 애초에 생활과 돌봄을 위해 설계된 공간이 아닙니다. 입원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환자는 병실에 누워 있는 게 일과의 전부입니다. 거동하기 어려울 정도로 병세가 위중한 사람만 입원시키니 당연하기도 하고, 보통은 입원 기간 자체가 그리 길지 않아 누워만 지내도 괜찮죠. 그런데 6개월 이상씩 입원하는 환자라면 병원 환경이 환자의 편의와 심각하게 충돌하게 됩니다. 단순히 일상생활 수행능력이 떨어졌다고 해서 요양병원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게 달가울 리 없죠. 또한 요양병원의 표준적인 병실은 한 방을 5~6명이 쓰는 구조인데, 환자 모두가 마음이 맞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툼도 잦습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온종일 붙어 있는 단체생활을 해야 하니까요. 그럼에도 많은 노인이 이런 병실 생활을 감내합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어 재정적 부담을 덜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환자의 보호자인 배우자나 자녀가 입소를 바라는 경우도 많습니다. 일본의 여성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우에노 치즈코上野 千鶴子는 저서 《돌봄의 사회학ケアの社會學》에서 돌봄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돌봄대상자의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돌봄제공자인 가족의 의사까지 ‘당사자’의 의사인 것처럼 간주하는 동아시아 문화를 비판했습니다. 환자가 거부하더라도 보호자가 원할 경우 입원해야만 하는 상황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러 이유로 노인에게 요양시설은 ‘가고 싶지 않지만 가야 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삶의 의미와 기억이 깃든 내 집에서 나이 들어가면 가장 좋겠지만 지금은 별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내 집에서 나이 들 수 있을까>, 박한슬 - 밀리의 서재

노인들에게 남은 현실적인 선택지는 요양병원뿐입니다. 내 집 대신 시설에서 생활하는 차선책을 택하는 거죠. 그런데 요양병원이 ‘병원’이라는 점이 다시 한번 요양보호사의 고용을 방해합니다. 장기요양보험은 장기요양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된 시설에만 지원되는데, 요양병원은 명목상 ‘의료기관’이기에 건강보험의 지원만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교육을 통해 전문성을 쌓은 요양보호사를 고용할 수 없고, 결국 차선책으로 간병인을 고용하게 됩니다. 차선의 장소와 차선의 인력이 결합한 기묘한 형태가 우리나라의 가장 보편적인 돌봄 풍경이 된 거죠. 그런데 요양병원에 입소한 모든 환자가 간병인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바로 ‘공동 간병’ 시스템입니다.*
<내 집에서 나이 들 수 있을까>, 박한슬 - 밀리의 서재
아들딸 구분 없이 부모 돌봄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한참 근로활동을 하던 자녀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맞닥뜨립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정혜 박사는 2017년에 근로자의 가족돌봄 경험을 조사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연구 결과는 꽤 충격적입니다. 가족돌봄 경험이 있는 1,000명의 설문 응답자 중 267명(26.7%)이 가족돌봄을 위해 퇴직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또한 퇴직경험자 중에서는 남성(22.2%)보다 여성(31.2%)의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부모 돌봄에서도 육아 문제와 비슷한 경력단절 양상이 나타난 것이죠. 퇴직을 감행한 응답자의 41.2%는 ‘휴가 또는 휴직이 가능했다면 퇴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응답한 것으로 보아 원치 않았던 퇴직임은 분명하고요.
이런 경력단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족돌봄에도 육아휴직 같은 제도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됐습니다. 그 덕분에 2008년 ‘가족돌봄 휴직제도’가 만들어졌지만 활용은커녕 제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다시 말해 현재로서는 자녀가 퇴직을 감행하지 않는 한 부모 돌봄을 전일제로 수행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일을 하는 주중 업무 시간에는 간병인이나 요양보호사를 고용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찮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주중에 방치되는 노인이 많아지죠. 이처럼 돌봄 공백은 가족 형태가 변화함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내 집에서 나이 들 수 있을까>, 박한슬 - 밀리의 서재
가족 내 돌봄은 명확한 대가 없이 비공식적으로 수행되는 경우가 많아, 돌봄 제공자가 아무런 보상 없이 부담만 짊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돌봄 공백은 사회 구성원의 역량과 잠재력을 소진시킵니다.
숭고해 보이는 돌봄 행위 이면에는 돌봄제공자의 신체적・정신적・사회경제적 고갈이 있습니다. 이를 ‘돌봄 부담caregiver burden’이라고 합니다. 돌봄제공자가 경험하는 부정적 영향의 총체를 뜻하죠. 또한 돌봄 부담에는 단일한 현상이 아닌 여러 가지 스트레스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데, 이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뉩니다. 바로 신체적 부담, 정서적 부담, 사회적 부담, 재정적 부담입니다. 앞장에서 재정적 부담을 자세히 살펴봤으니, 여기서는 정서적 부담과 사회적 부담에 더 집중하겠습니다. 가족돌봄자는 돌봄 과정에서 어떤 마음을 겪고 있을까요?
연구자 김민경은 여성 중고령자의 배우자 돌봄 여부가 주관적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분석한 결과, 돌봄을 수행하는 중·고령 여성은 돌봄을 수행하지 않는 중·고령 여성보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았습니다. 또한 전자가 인지하는 주관적 건강은 돌봄을 수행하지 않는 비슷한 나이대 여성보다 약 5.6배 나빴습니다. 이런 경향은 영 케어러, 곧 가족돌봄 청년에게서도 유사하게 관찰됐습니다. 이희선의 논문에 따르면 가족돌봄 청년은 비非가족돌봄 청년보다 우울의 위험이 4.3배가량 높았고 주관적 건강 상태도 더 나빴습니다
<내 집에서 나이 들 수 있을까>, 박한슬 - 밀리의 서재
북유럽 국가들이나 일본이 재활과 유닛 케어에 힘쓰는 이유 역시 이러한 관점의 전환 때문입니다. 이들은 노인돌봄을 ‘죽음을 기다리는 장소에서의 소극적 관리’로 보지 않습니다. 대신 ‘삶의 마지막 단계까지 존엄과 자립을 유지하도록 돕는 적극적 지원’으로 재정의했죠. 물론 여기에는 실리적인 판단이 함께 있습니다. 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복지국가가 생존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지속 가능한 전략이 바로 재활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이러한 국제적 흐름과 비교하면 한국의 돌봄은 매우 뒤처져 있습니다. 장기요양보험에는 ‘재활’에 관한 철학이 빠져 있습니다. 노인의 기능을 개선하기보다 현재의 등급에 맞춰 정해진 서비스를 정해진 양만큼 제공하는 데 급급하죠. 요양원은 다인실 중심의 수용시설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사회적 입원’ 현상도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노인돌봄을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닌 당장의 부담으로 여기는 구시대적 ‘보상적 복지국가’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보험료를 더 걷고 서비스를 늘리는 차원을 넘어, 돌봄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에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합니다.
<내 집에서 나이 들 수 있을까>, 박한슬 - 밀리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