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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2018 독서노트(134)문창용 감독 다큐 <다시 태어나도 우리>



린포체의 운명을 받아들인 다섯살 꼬마 승려 앙뚜와 그의 스승 우르갼의 동행을 담은 다큐멘터리<다시 태어나도 우리>. 문창용 영화감독이 무려 8년간 함께 다니며 촬영하고 1년간의 편집을 거쳐 만든 다큐멘터리다. 





문창용 감독은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사켜놓고 최대한 관찰자의 시점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인도 북부 라다크의 절경을 배경으로 앙뚜와 우르갼의 모습을 담았다. 800시간의 영상을 90여분의 작품으로 편집했다고 한다. 


나는 촬영시간이 길어야 2년을 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잡지<AROUND>VOLUME 57 영화 편에 문창용 영화가독의 인터뷰를 보며 새삼 놀랐다. 이처럼 끈질기고 정성을 들어야 좋은 작품이 탄생하구나! 깨닫는 순간이었다. 한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감독의 고뇌와 남모를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인터뷰가 있어 옮겨 본다.






그런데 린포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나요?

라다크 지역은 티베트 불교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해요.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생활과 문화가 불교의 영향을 받죠. 티베트 불교에서 린포체는 '고귀한 존재'를 의미해요. 전생에 덕을 많이 쌓은 스님이 그 업을 다 이루지 못하고 다시 몸을 바꿔 환생하는거죠. 깨달음의 말씀을 전달하는 수행자이자, 살아있는 부처의 존재로 여겨져요. 달라이 라마 역시 환생하신 린포체 중 한명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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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외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 해요. <다시 태어나도 우리>가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8년간 촬영하고 1년동안 편집 작업을 했으니까 총 9년만에 영화가 나온거네요.


보통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데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가요?

제 주변 다큐멘터리 감독들을 보면 보통 2년에서 3년 정도를 찍는 것 같아요.


10년에 걸쳐 한 작품을 찍었다는 게 쉽게 상상이 가질 않아요.

건강하고 모든 것이 왕성하던 30대에 처음 라다크를 밟았어요. 그대만 해도 9년 만에 영화가 만들어질 거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죠(웃음). 당시 제가 방송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너무 짧게 지켜보고 영상을 완성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일종의 후회가 있었어요. 깊이 있게 바라보지 못한 제 수준을 탓하기도 했고요. 좀 더 오랫동안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번 영화를 시작하긴 했지만, 1년이 되고 2년, 3년이 돼도 끝나지 않는 거예요. 절대로 제 계호기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았거든요. 한 5년 정도 영화를 찍으니까 주변에서 압력이 들어오더라고요. 들어오는 돈은 없고, 나가는 돈만 많으니까요. 아내가 이해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신경을 아예 쓰지 않은 건 아니었겠죠. 주변에서도 제가 하는 일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고요.


수입이 없는데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요.

펀딩을 받으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비행기 값과 체류비, 통역을 위한 현지 코디네이터 비용도 만만치 않거든요. 거기에 한 번 다녀올 때마다 번역해 놓은 문서가 제 키만큼 쌓여요. 정해진 인터뷰만 하는 게 아니라 하루 종일 마이크를 채우고 계속 녹음해서 번역하니, 그 비용이 어마어마하죠. 그런데 사실 금전적인 문제보다 이상한 소문 때문에 더 힘들었어요. 앙뚜에게 제자들이 찾아오지 않자, 일부 사람들은 그를 가짜 린포체라고 불렀어요. 그런데다가 우르갼 스님은 마을 환자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앙뚜만 챙기죠. 거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촬영만 하고 있으니, 틀림없이 저 어린 가짜 린포체를 포장해서 뒷돈을 챙기고 있는 모양이다 하고요. 우르갼 스님을 향한 비난을 통역사에게 전해 듣자 절망적인 마음이 들었어요. 과연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는 있을지, 한국에서 개봉할 수 있을지, 모든 게 불안해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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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동행의 처지가 된 거네요. 우르갼 스님과 린포체의 관계, 그리고 카메라 바깥의 두 감독님까지. 먼 길을 동행한 사람들이 95분짜리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나요?

주제에 관해서 많이 고민했어요. 린포체라는 신비한 존재를 포인트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한 아이의 성장과정을 그리라는 이야기도 있었죠. 저는 누군가의 위로와 사랑, 보살핌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되는지 말하고 싶었어요. 어쩌면 우르갼에는 앙뚜가, 앙뚜에게는 우르갼이 있는 것처럼 저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음을 깨닫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 잡지<AROUND>VOLUME 57 영화 편 중에서 발췌-




이 잡지 덕분에 주말 집에서 <다시 태어나도 우리>를 봤다. 앙뚜는 지금쯤 잘 있을까. 아릿하면서도 아련해지는 다큐다.














영화 블루레이 굿즈를 제작하는 곳, 흥미로워서 링크를 남긴다.

http://plainarchive.co.kr/shopping.html


잡지에 나온 독립영화, 예술영화 상영관도 남겨본다. 언젠가 가봐야지.


씨네큐브 광하문, 상상마당시네마, 인디스페이스, 아트나인, 필름포럼, 아트하우스 모모. 

  •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수행자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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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