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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리뷰

아들이 대신 쓰는 부모님 자서전

by 이야기캐는광부 2010.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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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어머니는 통닭가게를 15년동안 운영해 오셨습니다. 그전에는 양계장을 운영하며 닭과의 질긴 인연을 이어오셨죠. 더불어 살아오며서 닭똥같은 눈물을 여러번 흘리시기도했습니다. 그중에 저때문에 흘린 눈물도 있겠지요. 그러다보니 어머니의 삶은 왠지 닭을 닮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다음 글은 예전에 월간샘터 부모님자서전 코너에 투고한 글의 원본입니다. 닭을 닮은 저희 어머니 이야기이지요.  어머니 자서전을 짤막하게 아들인 제가 대신 써보았습니다.

하루종일 닭처럼 두발로 서계시는 어머니

어머니는 닭을 닮으셨죠. 아버지와 함께 통닭가게를 꾸려 온지도 언 14년.

                         ▲ 부모님께서 15년째통닭가게를 운영해오셨습니다

매일 자그마한 가게 안에서 닭처럼 두 발로 서 계셔요. 지난 삶을 돌아보아도 닭과 함께한 시간이 많았지요. 옛날에 양계장을 하면서 하루가 고될 때면 말 못하는 닭의 눈을 한참동안 들여 다 보기도 했고요. 때로는 날고자 하여도 날지 못하는 닭들의 날개를 어루만져 주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닭들이 지려 놓는 것은 당신의 눈물 같은 닭똥이었습니다.

 
                             ▲ 닭처럼 두발로 서서 골뱅이 무침을 만들고 계시는 어머니

통닭가게를 열고나서는 튀김기계에 들어가야 하는 닭들의 날개를 잘라야 했습니다. 한번이라도 날고 싶었던 닭의 꿈이 기름에 튀겨지고 말죠. 뜨거운 기름이 튀겨 팔뚝이 데이기도 여러 번이었고요. 그것은 힘겨운 하루와 14년 동안 싸워 온 흔적이기도 했답니다. 정말 앞으로 얼마나 더 데여야 하는 건지요?

예 투영통닭입니다

어머니는 배달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손님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세요.

“예, 투영 통닭입니다.” 당신이 곧 닭이라고 말하는 듯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이 많았답니다. 여러분, 앞으로 닭 날개를 먹을 때 한번쯤 생각해 보세요. 꿈을 펼치고 싶어도 그 날개를 펼쳐보지 못한 부모님의 삶을 말이에요.

아들아,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어....

어느 날 ‘전라북도 정읍시 투영통닭‘이라는 주소로 뜻밖의 소포가 날아왔어요.
“아들아,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을 때가 있어. 몇 일전에 네 외할머니가 한약 한 꾸러미를 소포로 붙이셨더구나. 원주에서 왔는데도 참 오랫동안 따뜻하더라. 왜 이런걸 보냈냐고 외할머니한테 전화했는데... 목소리 들으면서 울음을 참느라 혼났다. 당신의 건강도 안 좋은데 큰 딸의 건강이 더 걱정되었나봐.”

그것은 외할머니께서 직접 밭에 나가 일해서 번 돈으로 보내오신 거였죠. 사실 어머니는 작년에 자궁암 수술을 받은 이후 몸이 더 안 좋아지셨어요. 당신 한 몸보다 자식을 더 챙기는 부모의 마음이란 별을 닮은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자식생각에 가슴을 반짝이고 있으니 말이에요. 어머니가 멀리 강원도 원주에서 시집와서 정읍에 내려와 산지도 20여년. 20년 보다 더 오랫동안 외할머니의 마음은 그렇게 별빛처럼 딸에게 달려왔던 겁니다.

딸이 웨딩드레스 입은 날, 어머니는....

2007년 4월, 딸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날 어머니는 목이 메었습니다. 딸의 이름을 가까이서 부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아버지는 딸과 오랜만에 팔짱을 끼고 걸어 보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지만 그때는 자꾸만 눈에 밟혀 아팠다고 하십니다. ‘시집’이라는 것이 아름다운 詩한편만 담겨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다시 그 딸이 아장아장 걸어와 품에 안기기 시작했어요. 손녀가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거든요. 어머니는 손녀를 보면 높이 들어 안아주지요. 누나와 제가 아기였을 때도 그렇게 안아 주었겠지요?
그 때부터 자식은 부모의 마음속에서 절대로 내려놓을 수 없는 그 무엇인가 봅니다.

집에 가면 거실에 부모님의 결혼사진이 걸려있습니다. 그때의 앳된 처녀와 말끔한 총각이 이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되어버렸네요. 어머니는 사진속의 웨딩드레스를 딸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몸이 한결 가벼워 진 것 같지만 마음만은 한없이 무겁다고 하십니다. 딸도 이제 어머니가 되었기에.

보물단지 남편, 애물단지 남편

“어머니는 왜 항상 머리를 짧게 자르세요?”
“응, 연애할 때 너희 아버지가 짧을 때가 제일 예쁘다고 해서”

부모님은 서로 서울에서 친구소개로 만나셨대요. 한번은 인천 월미도 봉선화 밭에 놀러 가셨대요. 그 때 그 꽃처럼 수줍게 어머니를 바라보았던 아버지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때는 만날 때마다 두 볼이 사과처럼 발그레 지셨대요. 비록 부부가 돼서는 부부싸움을 하다 얼굴을 붉히는 일도 많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장 미울 때와 사랑스러울 때가 언제에요?”

“통닭가게를 운영하자면 닭 자르고, 무도 담그고 할 일이 많거든. 그런데 이 양반이 안도와주고 밖에 나가버릴 때가 있어. 그러면서도 ‘당신 힘들지’하며 피로회복제를 쥐어 줄때면 또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자식들 시집가고 장가가면 그래도 늘 옆에서 챙겨주는 사람은 남편밖에 없다고도 하십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사랑할 때는 사랑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이 참 정겨워요.

그래도 자식이 희망인걸 어떡하겠니...

어머니는 처녀시절 공장에서 일을 하며 가족들을 뒷바라지 했다고 합니다. 야학에 다니면서 배움에 뜻을 두기도 했지만 곧 그만두셨죠. 지금도 기회가 된다면 다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세요. 그런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처음 들어간 대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본 수능시험에서 쓴 잔을 마시자 많이 우셨어요. 그때는 통닭가게도 어려웠거든요.

가게에 혼자 계실 때면 그 얼마나 튀김기계 앞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갑자기 손님이라도 들어오면 재빨리 눈물을 닦고 그 얼마나 애써 환한 웃음을 지으셨을까요?

언젠가 어머니께 ‘어머니는 아들 때문에 행복했던 적 있었어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네가 중학생일 때 언제 한번 장학생이 되었잖니? 그때 장학생의 어머니라고 교무실에서 녹차 한잔 대접받았을 때. 그 때가 참 좋더라, 이 녀석아.”

집거실에 걸린 1985도에 찍은 결혼식 사진을 보니..

우리 모두에게 ‘그래도 자식이 희망’이라고 말씀하시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이라는 단어 앞에 ‘나의’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가 되지요.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많으실 부모님!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부모님 결혼식장에 찾아가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 곳 어딘가에 나란히 쓰여 있을 ‘신랑 김휘열, 신부 안음전’. 그 앞에 서서 두 분이서 앞으로도 항상 행복하시길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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