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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문학동네시인선100 기념티저 시집이 나왔다. 컴백을 앞둔 아이돌 가수들이 티져영상을 내놓으면서 복귀를 알리듯이, 문학동네는 앞으로 소개할 시인들을 모아 시집 한권으로 펴냈다.


시집은 적당한 크기와 높이, 깊이, 가벼운 무게를 지니고 있어서 좋다. 어려운 전공서적처럼 두껍지도 않고, 백과사전처럼 무겁지도 않다. 가방속에 많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면서, 넓은 언어의 바다를 품고 있다. 가르치려들자도 않고, 머리아픈 수학공식도 없다. 다만 천천히 음미하며 스며들게 할 뿐이다. 스스로를 뽐내지 않고, 그저 말을 건다. 행간의 침묵은 많은 생각이 깃들게 한다. 시집은 삶을 연주하는 거대한 오케스트라단을 이끌고 있는 것 같다.



이 시집에는 시인마다 1편의 시와 1편의 산문을 실었다. 시인의 우주가 담긴 시들이다. 오늘의 맛, 동병쌍년, 괴로운자, 윤곽들, 버드맨, 버려진 아들, 버드맨, 테라스, 11구역…. 대체 어떤 게 담긴 시일까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들이 눈길을 끈다. 


구글검색에서 '시(詩)=X'를 가지고 '나는 X를 좋아한다.'와 '나는 X를 사랑한다'라는 2가지 방식으로 검색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단다. '시를 좋아한다'보다 '시를 사랑한다'는 검색결과가 두배 더 많다는 것. 좋아하는 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시. 그 시 한편을 골라보는 것도 이번 시집을 읽는 재미이리라.



시 - 배영옥


원시 생물이 첫 눈을 뜰 때

딱딱한 캄브리아기의 시간을 뚫고

이제 막 새것인 시신경이 머리 주위로 모여드는,

몸 일부를 건네주고 눈 하나를 받을 때

껍질은 갈라 터지고 환부를 찢어발기며

처음 통증을 마지막 통증으로 다독이는,

통증의 말단으로 온몸이 집중하는 순간

검은 눈망울이 빛과 어둠을 가르고

바깥세상과 만날 때

마침내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의 물거품이 떠오르고

첫 눈빛 세례를 받은 바닷속

풍경 하나가 반짝, 반응할 때

세상이 드디어 어린 영혼의

외로움까지 감싸안으며 더욱 짙어지는,

한 생명이 자기 안의 어둠과 대면하는 바로 그 순간



윤곽들-김원경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약속들이 머무는 곳에서
부글거리는 해변은 목이 늘어난 티셔츠 처럼 출렁거린다
얼지 않는 슬픔을 위해
면사포처럼 깔리기 시작한 노을 구두는 축축하게 젖어 벗겨질 것이다

해초처럼 다른 장소에서 서로를 기다리다가 지쳐버린

연안처럼 숨을 쉬는
연인이 필요할
어떤 바깥은 섬진강에서 남해에 이르기까지
기억의 윤곽에서 불붙는 빛의 윤곽까지 밀려오고 버려지는 것들은 입에 경계를 문다

겨울은 새가 없는 걸까

더이상 고백할 것도 변명할 것도 남아 있지 않을
어느 별은 맨발로 뛰어내리고
전속력으로 뛰어내리고
지워지는 세상의 경계들과
비릿한 시간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다
우리의 간격은 물컹했고
어떤 전쟁에도 맞닿는 생이 있다
바람의 손목과도 같이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며
잘못된 예보처럼, 붉은 거품처럼
나도 경계에 불과할 때가 있다.

운명은 증명할 없다는
이제 얼고 있었다는

물이 들어왔다 사라진다
이제 시간은 아무것도 없다


퇴근 - 전영관


생활이 의문이란

바람에게 행선지를 묻는 일

연애도 안부도 없이 상스러운 거리에는

돌아보면 눈빛 깊어지는 사람들

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들


강이 먼 도시에 저녁이 오면 노을로 하루를 씻고

집에 돌아와 갓난쟁이의 맑은 이마에

순은의 별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아라

생계의 고단함을 

아내의 흐트러진 귀밑머리에서 찾아보아라


습관성 후회란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직후에 스치는 아쉬움

잔 욕심의 이복형제 같은 것들일 뿐이다

다친 손가락 같이

실수가 잦은 오늘을 견뎠으니 애썼다


능란한 바람도 모퉁이에 무릎 다치고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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