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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람여행

6월 4일 투표하는 어르신들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by 이야기캐는광부 2014.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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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전국 동시 지방선거일, 투표하는 어르신들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나는 투표 사무관으로 대전 동구의 한 경로당에 투입되었다. 조그마한 크기의 경로당이었는데 희한하게 절간처럼 풍경소리가 들렸다. 제법 운치있는 투표소 였다. 입구에 들어서자 '투표하는 당신이 아름답습니다'라는 문구가 반겼다.


오전 6시가 되자 투표가 시작되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몸빼 바지를 입으신 동네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투표장에 들어서신다. 한 할머니는 당당하게 몸빼바지의 꽃무늬를 흩날리며 들어오셨다. 바로 그때 범상치 않은 할아버지 입장!!


뽕짝을 틀고 투표장에 입장하신 할아버지


카세트를 허리춤에 찬 채, 뽕짝을 틀고 신~나게 입장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투표소는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의 미소 근육도 움찔움찔 하더니 빵 터져버렸다. 





"할아버지, 투표장에서 그러시면 안됩니다."

"그려..? 알았어~~허허..허하허허허"


기분좋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하면서 신이 절로 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실 그 할아버지는 아침부터 소주 한 잔을 걸치셨나보다. 볼이 발그레했다. 


#좆나게 왔는데 좆나게 다른 투표소로 다시 걸어가야겠다던 할머니


한 할머니는 친구로 보이는 할머니와 투표장을 찾아왔다. 그런데 웬걸...잘 못 찾아오셨다.


"할머니 이 투표소가 아니고 저기 저 옆 투표소에요."

"그려? 좆나게 걸어왔는데 여가가 아니여?"


할머니는 투덜거리셨다. 그러나 표정은 밝으셨다. 그까짓것 다시 걸어가면 되지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좆나게 걸어왔는디 또 좆나게 저그 투표장까지 걸어가야겠네"


욕이 왜 이렇게 찰지던지 또 웃음이 나왔다. 장난기가 많은 할머니 였다. 할머니는 다시 반복했다.


"좆나게 걸어왔는디 또 좆나게 걸어가야겠구먼"


랩 가사처럼 뭔가 라임이 느껴졌다. 올해 들어 귀에 착착감기는 욕이었다. 그러나 기분좋은 욕이었다.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하고 싶어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확 느껴졌기때문이다.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부축하고 투표하러 온 아들


오후  2시쯤 되었을까. 부자지간으로 보이는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와 아들이 투표소를 찾아왔다.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어제 퇴원하셨다고 한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하셨다. 아들은 아버지를 부축하고 천천히 투표대를 향해 걸었다.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할 때는 속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투표대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야...눈이 잘 안봬...어딜 찍어야 되는겨?"

"아버지...잘 보고 찍으세요."

"안 뵈는디 어떠켜?"

"잘 보고 찍으시라니까요."


할아버지는 투표대를 나오면서 한 마디 하셨다.


"뭔 놈의 투표용지가 이렇게 많데요?....누가 누군지 모르겄네..."


투표용지는 총 7장이었다. 할아버지가 불평하실만도 하셨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무사히 투표를 마치고 아들의 부축을 받아 투표장을 나섰다. 그 구부정한 뒷모습의 모습이 아름다워보였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잠옷 바람으로 투표하러 나온 여대생


이른 아침이었다. 잠옷 바람으로 투표하러 나온 여대생이 있었다. 분홍색이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눈은 부시시했다. 안경을 썼다. 신분증을 내밀고 쓰레바를 신고서 투표대로 들어섰다. 다행이었다. 투표하는 젊은 사람들이 있어서.


#5살배기 손자와 함께 투표장에 온 할아버지


투표소에 귀여운 손님이 찾아왔다. 한 할아버지는 손자와 함께 투표소에 들어섰다. 그 어린 손자는 티없이 순순한 눈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투표장을 둘러봤다. 대견하게도 할아버지가 투표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투표소의 누나들은 과자를 쥐어주었다. 그 아이에게도 몇 십년 후 소중한 투표권이 생기리라. 어른들은 이런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해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야 하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주민등록증에 있는 젊은 시절 모습


나는 투표하러 오는 사람들의 주민등록증을 받아서 투표명부와 대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사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셨을때는 주민등록증의 얼굴과 실제 얼굴이 너무나 달라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사연인즉 이랬다. 주민등록증에는 옛날 젊었을 적의 사진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분명 주민등록증의 얼굴은 젊으신데 실제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흰 머리도 가득했다. 아..누구나 젊은시절이 있구나. 세월은 이렇게 야속하게 흐르는 구나. 마음속에 이런 생각들이 스쳤다. 


그날 투표소에서의 주민등록증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추억앨범이나 다름없었다.


#오후 6시 투표 종료


어느덧 시계바늘이 오후 6시를 가리켰다. 투표는 종료되었다. 생각난다.


뽕짝을 틀고 입장하던 할아버지, 욕을 찰지게 하던 할머니, 아들의 부축을 받아 투표소에 오신 할아버지, 잠옷바람으로 온 여대생, 투표하러 온 가족, 손자와 함께 온 할아버지, 3번이나 투표소를 잘못찾아갔다가 겨우 찾아 온 할아버지, 8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투표를 하러 오신 할머니...


투표하는 어르신들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투표하는 모든 사람들의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지금쯤 그 투표소는 경로당으로 다시 돌아가 있겠지.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고, 할머니들은 수다를 떠시고.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어오고. 이마의 주름 사이로 시간은 흘러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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