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살 땐 일단 제목을 훑어본다. 그냥 느낌이 가는 제목이 쓰인 시집을 고른다. 어떻게 보면 충동구매다. 최승자 시인의 첫번째 시집<이 시대의 사랑>을 집 근처 서점에서 샀다. 사람도 기가 센 사람이 있는데, 작가의 시도 참 세다. 삶과 죽음의 경계, 아주 얇은 실선 위에 피어있는 한송이 검은 꽃과 같은 이미지다.
어느 여인의 종말
어느 빛 밝은 아침
잠심 독신자 아파트 방에
한 여자의 시체가 누워 있다.
식은 몸뚱어리부터
한때 뜨거웠던 숨결
한때 빛났던 꿈결이
꾸륵꾸륵 새어나오고
세상을 향한 영원한 부끄러움,
그녀의 맨발 한 짝이
이불 밖으로 미안한 듯 빠져나와 있다.
산발한 머리카락으로부터
희푸른 희푸른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일찌기 절망의 골수분자였던
그녀의 뇌 세포가 방바닥에
흥건하게 쏟아져 나와
구더기처럼 꾸물거린다.
가을의 끝
자 이제는 놓아 버리자
우리의 메마른 신경을.
바람 저물고
풀꽃 눈을 감듯.
지난 여름 수액처럼 솟던 꿈
아직 남아도는 푸른 피와 함께
땅 속으로 땅 속으로
오래 전에 죽은 용암의 중심으로
부끄러움 더러움 모두 데리고
터지지 않는 그 울음 속
한 점 무늬로 사라져야겠네.
내 청춘의 영원한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북
마음의 뒷쪽에선 비가 내리고
그 앞에는 반짝반짝 웃는 나의 얼굴
에나멜처럼 반짝이는
저 단단한 슬픔의 이빨.
어머니 북이나 쳤으면요.
내 마음의 얇은 함석 지붕을 두드리는
산란한 빗줄기보다 더 세게 더 크게,
내가 밥빌어 먹고 사는 사무실의
낮은 회색 지붕이 뚫어져라 뚫어져라,
그래서 햇살이 칼날처럼
이 회색의 급소를 찌르도록
어머니 북이나 실컷 쳐 봤으면요.
외로움의 폭력
요즈음의 꿈은 예감으로 젖어 있다.
무서운 원색의 화면,
그 배경에 내리는 비
그 배후에 내리는 피.
죽음으로도 끌 수 없는
고독의 핏물은 흘러내려
언제나 내 골수 사이에서 출렁인다.
물러서라!
나의 외로움은 장전되어 있다.
하하, 그러나 필경은 아무도
오지 않을 길목에서
녹슨 내 외로움의 총구는
끝끝내 나의 뇌리를 겨누고 있다.
최승자 시인
출생 : 1952년, 충청남도 연기
학력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 학사
데뷔 : 1979년 시 '이 시대의 사랑'
수상 :
2017년 제27회 편운문학상 시부문
2010년 제18회 대산문학상
2010년 제5회 지리산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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