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넓궤 가는길.
"제주 4·3 당시 이런 캄캄한 동굴에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숨어지냈을까?"
"들어갈때 몸이 캔처럼 찌그러지는 느낌이여..."
동광리 마을 동광목장 안 종나무 밑 작은 용암동굴 입구. 제주4·3 당시 지금보다 더 많은 나무와 풀로 우거졌다는 이곳. 나무 밑에 동굴이 있다는 걸 그 누가 알 수 있었을까. 그 누구라도 이곳을 쉽게 발견할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을 잘아는 마을사람들이었기때문에 가능했으리라.
그 작은동굴을 제주도에서는 큰넓궤(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산 90번지 일대)라고 부른다. 총 길이 180여m에 이르는 큰 넓궤는 제주 4·3 유적지다. 1948년 11월 중순 초토화 작전으로 토벌대가 마을 사람들을 마구 학살하기 시작할 때 마을 주민 120여명이 숨어 지낸 작은 동굴이다. 어린이나 노인들은 동굴안에서 지내고, 청년들은 동굴 밖에서 망을 보며 물과 식량을 날랐단다. 불을 끄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마을사람들은 서로 의지했다.
제주 4·3 사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출처 : 제주 4·3연구소 홈페이지-
평상시엔 안전상의 이유로 출입이 금지되는 곳, 큰 넓궤. 제주방문의해를 맞아 영화<지슬>의 촬영지이기도 한 큰넓궤를 특별히 들어가볼 수 있었다.
종나무 밑 큰넓궤 입구
종나무 밑 큰 넓궤 입구. 성인 1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다.
들어갈 때부터 몸을 팍 숙여야한다.
이날 한상희 제주도교육청 장학사가 큰넓궤에 얽힌 이야기를 설명해줘서 제주4·3의 역사가 더욱 피부에 와닿았다.
안전모를 쓴 채 낮은 포복자세로 작은 동굴안으로 직접 들어갔다. 한 마리 짐승이 되어 기어서 들어간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뱃살때문에 벌써부터 숨이 턱 막히고 갑갑했다. 무릎이 조금 까이고 바닥에 손을 집을때마다 울퉁불퉁한 지면에 손바닥이 아팠다.
조금 쉬다가 스마트폰 후레쉬로 위를 비추면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박쥐가 깰까봐 조심조심 기어들어갔다. 만약 안전모를 쓰지 않았더라면 머리가 동굴의 벽에 마구 긁혔을 것이다. 머리통에 상처가 났을듯하다. ^^;
어떤 곳은 몸을 아예 엎드려 통과해야했다. 울퉁불퉁하고 뾰족한 바닥에 몸이 쓸렸다. 얼른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정도엿다. 중간중간 당시 생활흔적을 보여주는 옹기들도 구석에 쳐박혀 있었다. 어렵사리 작은 동굴을 30여분(사실 들어가는 과정이 엄청 불편해서 시간을 잴 겨를도 없다) 정도 기어 들어가니 꽤 넓은 공간이 나왔다. 어떻게 이런곳에 사람이 살았을까하는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동광리 마을사람들이 제주 4·3 당시 토벌대의 학살을 피해 숨어지낸 그 넓은 공간. 화장실도 마련해 놓고, 동굴 안 2층 윗굴에는 울퉁불퉁하지 않은 평평한 공간도 볼 수 있었다.
당시 큰 넓궤에서 보냈던 시간을 증언해주신 홍춘호 할머니
"그때 한달넘게 살면서도 세수한번 못했어..캄캄한데 살았어. 캄캄한데 사니까 옷을 뭔 빨아입어. 그냥 입은옷 그대로 입고 사는거지. 사는것이 즘승, 즘승사는거나 마찬가진디.. 그렇게 살면서도 목숨은 아까워가지고 그리 숨어산그야..그 목숨이 뭐인지..밥은 남자어른들이 밖에 나와가지고 어느 밭틈에 맷들 갔다놔가지고 갈아... 먹을 것을 그걸로 헝겊에 싸서 그리 날랐어요. "
-큰넓궤에서 숨어 살았던 홍춘호 할머니 증언 / 그때 할머니는 10살배기 어린이였다. / 제주사투리로 인해 본래 말 그대로 옮기지 못했다.^^;-
숨어지낸지 한달여가 지나자 마을사람들에게 크나큰 위기가 찾아왔다고. 굴속에서 산지 40여일만에 마을주민들이 토벌대에 발각되고 만 것이다. 주민들은 불을 붙여 매운 연기가 밖으로 나가도록 마구 부쳤다. 결국 토벌대는 총만 난사하다가 물러갔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큰넓궤에 더이상 숨어지낼 수 없었단다. 주민들은 큰넓궤를 나와 한라산을 바라보고 산으로 들어갔다. 한라산 영실 인근 볼레오름 지영에서 토벌대에게 총살되거나, 생포되어 정방폭포에서 학살당했다. 그야말로 비극이었다. (제주도의 아픈 역사를 품은 큰 넓궤와 마을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지슬>을 보면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겨우 동굴 내부를 담았으나, 사진이 많이 흔들렸다.
큰넓궤안에서 모두 후레쉬와 불을 끄고 4·3희생자들을 생각하며 묵념했다.
고인의 넋을 기린 후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큰넓궤를 나오는 시간은 더욱 빠르게 느껴졌다. 들어갈 때는 언제 넓은 공간이 나오나 한숨만 푹푹 쉬었는데 나올 때는 보다 재빨리 나올 수 있었다. 물론 나올 때 자세는 똑같았다. 저 멀리 입구의 빛이 보일때의 감격이란. 나라면 이곳에서 하루도 못 살 것 같았다. 두달 가량 산 당시 마을주민들의 심경과 아픔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이런 가슴 아픈 역사는 다시 되풀이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4·3희생자 분포도
큰 넓궤를 나와 안전모를 벗었다. 바지에는 흙이 묻어있었다. 목장갑을 끼었어나 손바닥이 빨갰다. 내 마음은 캄캄한 동굴처럼 어두웠다. 당시 마을사람들의 심정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참담했을것인가. 큰 넓궤를 들어가는 과정이, 당시 마을사람들의 시커먼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같았다. 평범한 마을사람들이 홀로 감내하며 묵묵히 슬픔을 삼켰을 시간들. 제주도에 핀 동백꽃은 왠지 그 당시 사람들의 피묻은 가슴을 열어보이듯 붉게 피었다.
목이 말랐다. 팸투어 버스에 올라 타 생수를 들이켰다. 물방울이 떨어졌던 동굴안처럼 목구멍이 차가웠다. 큰넓궤를 들어가본 경험을 결코 잊지못할것이다.
영화 지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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