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토지를 점거해야하는 건축은, 그 장소가 요구하는 특수한 조건들을 맞추어줘야 한다. 기후와 지리 등의 자연적 조건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일궈낸 인문사회적 환경 속에서 조화롭게 자리잡고 알맞은 옷을 입을 때, 이는 그 장소에 적확한 건축이 된다.
서울 시내의 피라미드가 우습게 보이듯이, 파리에 짓는 한국 집은 전시 대상은 될지 몰라도 그곳에서의 삶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토지는 그 규모에 관계없이 우리 인간의 삶 이전에 태어나 있었으며, 그 이후로 영겁의 세월을 지내어와 있다. 그 세월 속에서 수없는 사연들이 담기고 또 지워졌을 것이며, 그러한 흔적의 축적은 형언키 어려우리만큼 엄청난 양으로 그 속에 용해되어 있을 것이다.
토지의 위치가 어느 곳에 있든 토지는 고유하며, 그 고유성으로 인해 그 가치는 그것의 중요도에서 비교 평가되거나 절하되어질 수 없다.
따라서 장소성의 회복은 건축가로서 지켜야 할 토지에 대한 신성한 의무가 된다. 토지 속에 담긴 흔적을 발견해내는 것. 그리고 이들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 또한 그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침목하는 토지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토지에 생명을 갖게하며, 이에 비로소 그 장소성은 회복된다.
이 합목적성과 장소성은 건축의 개별 성격에 따라 달라질 것이며, 한 건축가의 작업이라 하더라도 그 양상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어느 한 건축가의 작업을 이러한 합목적과 장소와 관계없이 일관 짓게 하는 것은 그 건축가가 가진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작의이다. 따라서 건축가의 항상성이라고 일컫는, 시대를 관조한 작의가 투영된 건축의 사상적 배경, 이를 건축의 시대성이라 하자.
-승효상 <빈자의 미학> 15~17쪽-
빈자의 미학. 여기에선 가짐보다 쓰임이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하다.
-승효상 <빈자의 미학> 59쪽-
승효상을 보면 건축가도 철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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