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자신의 생각들을 펼치고 있는 책이다. 보통 조직의 비효율성에 대한 이야기는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거나 친한 동료들끼리 뒷담화식으로 하기 마련이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아 그지같네."
"지들은 안하면서 맨날 시키기만 하고"
"밑에 사람들이 말해봤자지. 지들 생각대로 결국 될텐데"
"쓸데 없는 보고만 졸라 많네."
"이런 보고서를 왜 만들고 앉았는거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보통 저렇게 푸념 식으로 끝난다. 그러고는 자리에 돌아가 컴퓨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리며 다시 일할 뿐.
하지만 이 책은 15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으로 논리적이고 공개적인 방식으로 공직사회의 문제점을 알리며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과정에서 두려움, 용기, 오랜 성찰,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책에 있는 내용들은 근거있는 비판이어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저자와 같이 일했을 다른 사무관들이나 상관들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다.
공직사회에선 회의도 상당히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월요일 아침 장관이 주재하는 실·국장 회의는 실국장급 간부들이 주재하는 과장단 회의로 이어졌고, 다시 과장은 과원들을 불러 모아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장관의 지시가 전달되는 방식은 마치 옛날 TV 프로그램 <가족 오락관>의 ‘고요 속의 외침’과 같았다. ‘고요 속의 외침’에서 한 사람의 말을 끝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을 거치는 것처럼, 장관의 지시는 국장과 과장을 거쳐 직원들에게 전달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달하는 사람의 주관도 약간씩 섞이기 마련이라 장관이 정말 뭐라고 말했는지 말단 직원이 확신할 수 없다는 점도 ‘고요 속의 외침’과 무척 닮아 있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노한동 지음 - 밀리의 서재
하지만 정부 안에서 토론의 부재는 대단히 위험하다. 순환보직으로 인해 공무원 개개인, 특히 과장급 이상의 관리자가 해당 분야에 대해 갖고 있는 전문성이 심각하게 낮기 때문이다. 「공무원 임용령」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실무자의 필수 보직 기간은 3년, 과장급 이상은 2년이지만, 현실에서 근무하는 기간은 원칙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기관장의 재량을 인정하는 임용령상의 폭넓은 예외 때문에 현실적으로 사무관은 2년이면 한자리에 오래 있는 축이고, 과장급 이상은 1년마다 교체된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무원은 생전 처음 보는 분야의 과장급 이상 관리자를 맡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문체부를 예로 들자면, 법을 전문적으로 알아야 하는 저작권 분야에서조차 「저작권법」을 처음 본 사람이 국·과장 보직을 맡는 경우가 있다는 뜻이다. 그마저도 그 분야에 대해 조금 알만하면 1년마다 자리를 옮기는 형국이니 관리자에게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쌓일 리가 없다.
전문성이 부족한 관리자는 자신이 맡은 분야의 내용을 아는 실무자 및 공공기관, 학계, 전문가의 말을 두루 경청해야 한다. 결정을 그들에게 위탁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관리자는 풍부한 공직 생활 경험으로 국회나 언론에 대한 대응 등 행정이 돌아가는 원리를 잘 알고 있으므로 그들과의 활발한 토론을 통해서만 정책의 전문성과 수월성을 동시에 갖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노한동 지음 - 밀리의 서재
그러나 공직사회에는 복종보다는 토론이 필요하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아돌프 아이히만을 분석하며, 악의 근본적인 원인을 깊은 증오나 사악함이 아닌 평범하고 무비판적인 복종과 직무 수행에서 찾았다. 이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구현되었다. 평범하고 무난한 성격의 사람들이 만든 사회가 때로는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아렌트의 섬뜩한 이론이다. 우리나라의 공직사회는 한나 아렌트가 경고한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앞서 언급한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공무원들은 대부분 뻔히 잘못된 지시인 줄 알면서도 침묵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노한동 지음 - 밀리의 서재
나는 그렇지 않다고, 국장님만 보고받으시면 되는 사안이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그제야 국장은 펜을 내려놓고 편안한 표정으로 설명을 들었다. 딱히 국장의 결심이 필요한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고는 비교적 수월하게 끝났다. 더 앉아 있어 봐야 괜히 일이나 더 시킬 것 같아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국장은 아직도 미간을 만지며 보고서를 한참이나 더 쳐다보았다.
“보고서 연습 좀 더해야겠어. 보고서 앞쪽에 필요 없는 말은 좀 줄이고, 뒤에 내용을 늘려. 이런 건 다 본문에 필요 없는 내용이니까 붙임 처리하고….”
국장은 한참이나 지적을 이어갔지만 뭐라고 대꾸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과장이 전적으로 수정했기 때문에 그 보고서엔 내가 쓴 원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국장에게 대놓고 이를 수는 없어, 괜히 멋쩍게 웃으며 더 열심히 하겠다고 고개를 푹 숙였다. 왕년에 보고서로 전 부처에 이름을 날렸다며 그토록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던 과장의 보고서가 국장의 눈엔 낙제에 가깝다는 점을 내 눈으로 확인하니 왠지 모르게 통쾌하기도 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노한동 지음 - 밀리의 서재
그러나 세상엔 1장짜리 보고서로 모두 담을 수 없는 문제들이 가득하다. 문제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거나 다양한 요인이 얽혀 있으며, 해결 방안 역시 많은 논의가 필요한 사안들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정부 보고서는 이런 문제를 다룰 때도 ‘핵심만 간단하게’라는 원칙에 경도된다. 보고서 1장에 모든 내용이 깔끔하게 담길 수 있도록 문제점과 원인, 해결 방안을 2~3가지의 맥락으로 포섭하고, 서로 조응되게 구성하여 현실을 의도적으로 평탄화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타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현실의 이해관계는 몇 가지의 단순한 맥락으로, 의도적으로 치환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독서율 하락에 대한 대책을 보고서로 쓴다고 가정하자. 일단 독서율 하락의 원인은 무엇인가? OTT 등 영상매체의 약진? SNS의 범람? 장시간의 근로나 공부로 인한 시간의 부족? 어릴 적 독서 습관의 부재? 혹은 경제적 어려움? 하나하나 독서율 하락의 원인으로 생각해 볼 만한 주제이다. 그러나 한 장의 보고서에 그 모든 걸 맥락 없이 담을 수는 없다. 결국 보고서는 이를 독서 환경의 미비,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 독서 습관의 부족 등으로 적당하게 ‘포섭’한다. 이 과정에서 무엇이 독서율 하락의 진짜 이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해결 방안으로 사용할 그럴듯한 정책적 수단이 있는지를 먼저 고민하고 그에 맞춰 원인을 정리하는 식이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노한동 지음 - 밀리의 서재
다면 평가의 취지는 당연히 좋다. 위에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위아래 모두에게 잘하는 사람이 조직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하지만 공직사회의 많은 제도가 그렇듯 다면 평가제도는 좋은 취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몇 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다.
먼저 평가자의 범위 문제이다. 제도의 설계에 따라 다르지만, 문체부에서 시행했던 다면 평가는 기본적으로 모든 직원이 특정한 직원을 평가할 수 있다. 특별한 요건이 없어도 평가자와 피평가자 사이가 성립되기 때문에, 지나가다 복도에서 서로 목례만 나눈 직원 사이에서도 서로서로 평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평가자가 피평가자를 잘 모르는 경우 자신의 판단에 의해 평가에서 제외할 수는 있지만, 그 또한 단순히 개인의 선의에 기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평가의 공정성 문제를 야기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성과와 인성을 직원들이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최악의 상황에는 조직적으로 세력이 개입하여 승진이 필요한 특정 직원의 평가를 밀어준다든가, 혹은 승진을 경쟁하는 다른 직원의 점수를 악의적으로 낮게 줄 수도 있다. 학연, 지연, 입직 경로까지 다양한 형태로 공직사회에 존재하는 사적인 네트워크가 선후배의 승진을 위해 조직적으로 개입하여 평가를 왜곡해도 막을 길이 없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노한동 지음 - 밀리의 서재
자리에서의 성과를 묻지 않고, 어떤 보직에 있었느냐로 승진 고과를 평가하는 시스템으로는 공무원을 안정적인 수비수로 키워낼 수 있어도 날카로운 공격수로 길러낼 수는 없다. ‘무엇을 얼마나 잘했느냐’를 묻지 않는 평가 시스템은 새로운 생각과 창의적인 정책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유인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공무원은 그저 연공서열에 따라 제공되는 보직 경로에 따라 ‘존버’만 잘하면 되기 때문이다. 초임 때는 사업 부서에서 일하다가 중고참이 되면 일과로 자리를 옮기고, 더 시간이 지나면 기획조정실 등에서 부처의 전체 업무를 총괄하는 보직을 받는 식이다. 어차피 해당 보직에서 어떤 성과를 보였는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보직 경로를 충실히 밟기만 해도 승진은 알아서 뒤따라온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노한동 지음 - 밀리의 서재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공직사회에서 통용되는 성과평가와 승진의 기준은 ‘무엇을 얼마나 잘했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얼마나 가까이에서 보좌했는가’이다.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윗사람의 심기를 맞추는 데 전적으로 집중되고 쏠린 이 시스템은 공무원이 보수적이고 회피적인 태도를 갖도록 만들며, 조직 내의 새로운 아이디어 창출이나 전반적인 혁신을 방해한다. 결국 성과보다는 순응이 더 큰 가치를 인정받는 환경에선 개인의 능력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조직 전체의 발전은 정체될 수밖에 없다. 공직사회는 항상 유능한 인재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무사안일에 능숙한 사람만을 자꾸 양산하고 있는 셈이다. 일과는 우대하고 말과는 하대하는 인사 시스템의 개선 없이는 공무원의 잠재력이 빛을 잃는 구조가 반복될 뿐이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노한동 지음 - 밀리의 서재
온콜에 시달리는 모든 공무원은 기본적으로 소극 행정을 지향하게 된다. 근무 시간 내내 열심히 일해도 위에서 시키는 거대한 비효율과 관습을 감내하기 벅차기에, 스스로 일을 벌여가며 무언가 해보겠다고 나설 시간과 의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 역시 경력이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이런저런 정책과 아이디어를 쏟아내며 의욕을 불태웠으나, 연차가 쌓일수록 점점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 모든 일을 다 하려고 했다가는 온콜이 문제가 아니라 집에도 제대로 못 들어가게 생겼으니 말이다.
무분별한 온콜 요구는 공직사회에 소극적인 태도를 뿌리내리기에 결코 ‘공짜’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마어마한 비용이다. 미래에도 문제가 개선될 여지는 별로 없다.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보상을 선호하는 MZ 세대에서 공직의 인기가 눈에 띄게 추락하고 있는데도, 공무원 조직에서는 대부분 무언가 바꿔 보려는 시도조차 없다. 그래도 아직은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이 수십 대 일에 이르고, 저연차 공무원들의 퇴직이 현장에서 체감될 정도로 급증한 수준은 아니어서일까. 오히려 간부들의 현실 인식은, 세상사 돌고 돌아 IMF와 같은 경제 위기가 오면 공직의 인기가 다시 높아질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나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노한동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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