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노트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아이콘>, 철학개념들을 공부하다

by 이야기캐는광부 2013. 2. 6.
반응형




'철학적 개념을 알아두면 철학에 관한 전문지식이 없어도 자신의 관심사에 관해 철학적 수준에 맞먹는 깊은 사유를 할 수 있게 된다.' 진중권씨가 씨네21에 연재한 글을 모아놓은 책<아이콘>의 뒷표지에 쓰인 글이다. 진중권은 이 책을 통해 흥미로운 철학개념들을 제시하며 그  사용법을 적절한 사례와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읽다보면 '이런 철학개념은 이런 생각을 할 때 쓰는구나'하고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다. 물론 내가 이 책의 모든 철학적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다만 그 철학개념들이 처음 들어본 것들이 많아서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읽어내려갔다. 


책에는 파타포, 범주 오류, 라코닉, 시차적 관점, 차이와 반복, 시뮬라크르, 유물론자의 신학, 탈주, 텔로스, 데드팬 등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철학개념들이 등장한다. 아, '시뮬라크르'와 '차이와 반복'은 전에 들어봤다. '시뮬라르크'로 알고 있었다는 게 창피하지만 말이다. 책에서 만난 철학개념들의 뜻을 정리하는 것만으로 벅찰듯하다. 나도 언젠가 진중권씨처럼 철학개념들로 사회나 현상을 분석할 수 있는 눈을 지닐 수 있을까? 철학개념들에 대해 감을 잡고가는 수준에서 이 책을 덮어야 하는 내 지적 수준이 가여웠다. 별 수 없다. 철학개념들을 이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정리하는 걸로 독후감을 마칠 수밖에.



▲ '트윗과 리트윗은 서로 같지 않은 이유'. 리트윗은 원래의 맥락과 다른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 '인용'에 대한 설명 : 인용에 대해 이렇게 생각안해봤는데 인용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되었다.


'인용'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인용'이란 하나의 텍스트를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 다른 맥락에 옮겨놓는 작업. 이때 그 문장을 적절한 맥락에 옮겨놓지 않으면, 인용자는 해석의 폭력을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맥락이 적절하다 해도, 인용문의 의미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원래의 맥락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이 차이를 '일탈'이나 '왜곡'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나, 바로 그 '일탈'과 '왜곡'을 통해 텍스트는 외려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 인용은 그 극한적 예를 보여준다.

- 70쪽, 리트윗의 반복가능성 -


- '파타피직스'에 대한 설명 : 이런 학문도 있나싶어 신기해서 여기 옮겼다.


'파타피직스'. 20세기 중반 유럽의 지성계를 풍미하던 신학문으로, 이 용어의 창시자는 프랑스의 극작가 알프레드 자리다. 예민한 어감의 소유자라면 '파타피직스'가 '메타파직스'의 패러디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메타피직스metaphysics를 흔히 '형이상학'으로 옮기나, 사실 '메타meta'는 '이후'라는 뜻. 그리스어에서 '이상'을 가리키는 것은 '파타pata '다. 따라서 곧이곧대로 말하자면, 파타피직스야말로 진짜(?)형이상학인 셈이다. 


'형이상학'은 감각세계 너머의 초월적 세계를 탐구한다. 즉 그것은 (물리학, 생물학, 화학 등) 감각세계를 탐구하는 학문들의 위에 서 있다. 학문들 중의 학문을 자처하는 이 메타학문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그것을 굽어보는 최고의 학문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파타피직스다. 파타피직스는 형이상학 위의 학문, 즉 초超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메타파직스가 과학적 증명의 의무에서 자유롭다면, 파타피직스는 형이상학을 구속하는 논리학마저 초월한다. 대체 무슨 학문일까?


이미 짐작했껬지만, 파타피직스는 온갖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로 가득 찬 사이비 철학(혹은 과학)을 가리킨다. 

-14쪽~15쪽, 이상한 나라의 형이상학 -



- '범주오류'에 대한 설명 : 어려운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해 놓은 것 같아서...^^;


범주오류란 '어떤 사물을 그것이 속하지 않는 집합에 넣는' 실수를 가리킨다. 라일이 보기에 철학은 이런 오류에 가득 차 있다. 대표적인 것이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즉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를 모두 '실체 substance '라고 불렀다. 하지만 신체는 공간을 차지하나, 정신은 그렇지 않다. 뇌를 열어봐도 거기서 정신을 볼 수는 없잖은가. 이렇게 정신과 신체는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하는데, 데카르트는 이 둘을 같은 범주 안에서 묶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라일은 데카르트의 정신을 '(신체라는)기계속의 유령'이라 비꼰다.

- 42쪽~43쪽, 범주 오류-


- '싱크레티즘'에 대한 설명 : 이런 개념도 있나 싶어서..^^;


기독교가 수입되기 전에도 지중해 지역에는 정복당한 이집트 문명과 정복자의 문명인 헬레니즘의 융합 현상이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혼합주의는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신학자 하비 콕스는 한국에서 기독교가 성공을 거둔 바탕에는 샤머니즘이 깔려 있다고 지적하지 않았던가. 브라질에는 노예들이 가져온 아프리카 토착 종교와 주인들이 가져온 유럽의 종교가 뒤섞인 혼합 종교들이 많다고 들었다. 이렇게 이질적인 종교나 문화가 합쳐지는 현상을 '싱크레티즘'이라 부른다.

- 96쪽, 정체성과 차이 - 


- '탈주'에 대한 설명 : 탈옥은 들어봤는데 이 개념은 또 처음 들어봐서...^^;


한동안 '탈주'라는 은유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것은 '체제, 권력, 혹은 동일성의 폭력에서 벗어나 끝없이 자신을 생성하라'는 어떤 조재미학의 명법으로 보인다. 그 용어 자체는 들뢰즈에게서 유래할지 몰라도, 그에 앞서 그것을 실천한 것은 20세기 초의 이른바 '아방가르드'예쑬가들이었다. 

- 150쪽, 탈주와 아방가르드-



- 생각거리를 주고 있어서


오늘날 세계를 바꾸려는 사람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졌어도, 그들과 내가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신의 믿음을 상대화해야 비로소 타인과 소통이 가능하다. 소통이 가능해야 연대도 가능하고, 연대가 가능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은가.


급진적인 것은 사태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급진적으로 되려면 무엇보다 제 뿌리로 돌아가, 제 신념의 토대를 힘껏 흔들어보아야한다. 오늘날 사회를 바꾸는 데에 필요한 것은 확신에 가득 찬 혁명가가 아니라, 회의로 번민하는 아이러니스트다.

- 159쪽, 저항의 미학 -




-책에 나온 흥미로운 예술가들


사진작가 키스 커팅햄, 낸시버슨, 기타노 겐, 크리스 돌리 돌리 브라운, 로테타 룩스

토마스루프



- '지루함'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

느낌이 이성보다 근원적이라 보는 철학에서는 당연히 '기분'이 중요한 주제가 된다. '역겨움'과 더불어, 철학적 의미를 갖는 기분이 또 있다면, 아마도 '지루함'일 것이다. 실존철학의 담론에서 '지루함'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예 현대인의 조건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한때 삶에 의미를 주었던 최종적 권위들(신, 국가, 이념)은 무너졌다. 산업화한 도시 속에서 모든 것은 기계적으로 반복된다. 이렇게 무의미한 삶이 기계적으로 반복된다는 느낌, 이것이 현대인이 느끼는 지루함의 요체가 아닐까?

- 207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지루함 - 


-범죄와 예술의 공통점이라..


범죄와 예술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기존의 규칙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범죄에는 예술성이 있꼬, 위대한 예술에는 범죄성이 있다. 꽤 그럴 듯하게 들리는 이 말은 때로는 위험할 수 있다. 가력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유미주의 원리의 극단적 경우를 생각해보라. 로마 시내에 방화를 하고 리라를 켜며 시를 읊었다는 네로 황제, 옆집에 불을 질러놓고 소나타를 연주한다는 김동인의 <광염 소나타>, 그리고 전쟁의 참성에서 새로운 미학적 원리에 대한 영감을 얻어야 한다는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

- 215쪽, 악마의 철학 -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