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청년작가의 꽃무늬 신발은 에로티시즘의 꽃잎을 흩날리고 있었다.
작가 박범신이 지난 7월 11일 라푸마둔산점 2층 여행문화센터 산책에서 열린 ‘주름 자유낭독회’를 찾았다.
“주름을 어떤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에로티시즘의 생성과 성장과 그 소멸에 관한 소설이라 말해주고 싶었어요.”
작가는 1999년 발표한 소설 ‘침묵의 집’을 두 번에 걸쳐 개작해 ‘주름’으로 재탄생시켰다.
이날 주름의 문장들은 300여 명 청중들의 마음에 불같은 혀를 들이밀었다.
김진영과 천예린 사이에서
“에로티시즘은 금기된 것에 대한 욕망입니다.”
주름은 50대 중반의 주인공 김진영이 시인이자 화가인 천예린을 만나 짓눌려있던 삶의 욕망을 해방시키기는 이야기다. 소설에 등장하는 성행위 묘사는 온몸의 성감대를 핥아 버릴 기세로 달려든다. 그러나 주름은 결코 ‘부도덕한 러브 스토리’가 아니었다.
“김진영이 천예린에게 한순간에 거꾸러져 버린 것은 천예린이 육체적으로 뛰어나게 섹시하거나 다른 여자보다 예뻐서가 아니에요. 김진영의 인생에서 영원히 금기되어있던 어떤 큰 문화를 천예린이 갖고 있었던 것이죠.”
작가는 발을 번쩍 들어 꽃무늬 신발을 보여줬다. ‘노년’이라는 꽃받침위에서 다시 피고 있는 청춘의 모습이었다.
“제가 신고 온 신발이 에로티시즘이에요. 나는 에로틱한 남자이기 때문에 이 금기를 넘어서고 싶거든요. 오늘 구두를 신고 올 수도 있었죠. 하지만 나는 거기에 굴복하기 싫어요. 시간에 굴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꺄르르 청중들은 환호했다. 저마다 금기를 향한 욕망을 품고 있다는 듯이 뜨겁게.
욕망, 억압에서 해방으로
주름을 읽다보면 한번 쯤 고개를 드는 물음. 과연 김진영처럼 살 수 있을까.
“우리가 실제 김진영처럼 어떻게 살겠어요. 그렇게 못살죠. 그러나 이 소설을 통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진실로 행복해지기위해서 감옥살이와 같았던 우리들의 본능의 일부를 해방시키는 경험, 이것을 김진영이 대신해주고 있는 겁니다.”
작가는 지난 50여년의 세월 속에서 우리가 본능이 너무 억압된 시대를 살아왔다고 일갈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해질 때도 됐다며.
과연 어떻게?
“우리는 이제 가둬뒀던 우리 마음속의 시인, 우리 마음속의 에로티시즘을 발현하는 찬스들을 향유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야 정말 행복해 질 수 있거든요.”
낭독, 주름의 재발견
깊은 울림이었다.
대학교수, 연극배우, 성우지망생…. 6명의 주름 낭독자가 무대에 올랐다.
"과실 속에 씨가 있듯이, 태어날 때 우리는 생성과 소멸, 탄생과 죽음이라는 2개의 씨앗을 우리들 육체의 심지에 박고 태어난다. 생성과 소멸은 경계 없는 동숙자이다."(주름 9쪽)
천예린은 실토했다.
"내가 병들고 나서 깨달은 한 가지는, 우리가 우리들의 본능을 너무도 존중하지 않는 삶의 체제 속에 놓여 있다는 거였어.”(주름 294쪽)
그래 맞아. 그렇지. 그랬어. 김진영은 말했다.
"내 자아라고 생각했지만, 기실 사회구조 속에서 훈련받은 가짜 자아, 그 허위를 깻박치고, 평생 억눌려 있던 본질적인 나의 다른 자아를, 그녀는 부드럽게 끌어내어 동등한 우의로 그것을 존중해주었다. 내가 수치스럽다고 여기어 한사코 폐기 처분 했던 본능을 존중해준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그것은 내가 일찍이 상상하지 못했던 행복이었다."(주름 294쪽)
주름의 문장은 마음을 뒤흔드는 바람이었다.
음악, 조은주, 진채, 황철
달팽이관이 달아올랐다.
이날 자유낭독회는 이상은 라푸마둔산점 대표의 유쾌한 사회로 열기를 더했다. 청중들은 어렸을 적 소풍 가기 전 날 밤 인 냥 즐겁게 들뜬 모습.
“오카리나에서 새 소리가 나는데 제 목소리는 막걸리 한잔 마신 것 같다고 해요. 그래서 친근하데요.”
오카리니스트 조은주는 숨을 골랐다. 도톰한 입술을 오카리나로 가져갔다. 깊숙이 숨을 불어 넣었다.
삐옥 삐옥. 삐삐삐옥. 삐옥삐옥. 아름다운 연주에 맞춰 청중들은 손뼉을 쳤다. 마음의 둥지로 아름다운 새가 날아들었다.
“버르장머리 없이 작가님이 소설 표지에 써주신 글을 가지고 간단하게 곡을 만들었어요. 이 노래를 주름이라고 제목 붙였습니다."
논산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이자 '진채밴드'의 리더 정진채는 작가의 말을 노래로 바꿔 불렀다.
“♪평생~내가 잡고 싶고, 알고 싶었던 것은 바람이었고, 시간의 주름이었다♩”
작가는 노래를 부르는 고향후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작가의 중학교 친구 황철은 금빛 색소폰으로 ‘이별의 종착역’을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고 작가는 친구를 꼭 껴안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소금, 산다는 건
이 글의 종착역이다. 작가의 손에 들렸던 ‘선기철 강경 소금’이 자꾸 떠오른다.
자유낭독회가 시작되기 전 시낭송가 이삼남씨는 작가의 장편소설 ‘소금’ 한 구절을 읊었지.
“아, 달고 시고 쓰고 짠 눈물이여/ 어디에서 와 어디로 흐르는가/ 당신이 떠나고 나는 혼자 걸었네/ 먼 강의 흰 물소리 가슴에 사무치고/ 나는 깨닫네 사는 건 먼 눈물이 오가는 길 /그리움을 눈물로 씻어 하얗게 될 때까지 / 눈물을 그리움으로 씻어 푸르게 될 때까지 / 사는 건 저문 강 다만 나직하게 흘러가는 일 / 아 달고 시고 쓰고 짠 눈물이여”(<소금>에 등장하는 선명우의 자작곡 ‘눈물’)
산다는 건 무엇일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김진영과 천예린도 같은 고민이지 않을까.
작가는 애잔한 목소리로 최백호의 ‘길위에서’를 부르며 삶을 노래했다.
“긴 꿈이었을까 / 저 아득한 세월이 / 거친 바람 속을 참 오래도록 걸었네 /긴 꿈이었다면 덧없게도 잊힐까/ 대답 없는 길을 나 외롭게 걸어왔네(…)”(최백호의 노래 <길위에서> 앞 부분)
벌써 한 달 여가 지난 지금, 주름 자유낭독회는 아주 기분 좋은 꿈과 같다.
살다가 거친 바람 속을 헤맬 때면, 이날의 소소한 풍경 한 토막을 꺼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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