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시집의 제목에 쓰인 시가 대표 작품인 경우가 많다. 오늘은 잘 모르겠어. 그동안은 알았지만, 오늘만큼은 모르겠다는 뜻 일까. 내일은 알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담긴 메시지일까. 어제와 내일의 틈바구니에서 오늘은 얼마나 불확정성을 띌까. 확실한 게 있을까. 그런 잡념에 빠지게 하는 제목이다. 오늘을 살고 있지만 그 오늘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시집을 볼 때면 그 안에 있는 작품보다 오히려 시집의 제목에 관심이 더 갈 때가 있다. 제목으로 쓰인 시를 옮겨 본다. 그리고 유독 마음을 끌어당기는 시 한편도 적어본다.
제목 : 오늘은 잘 모르겠어 / 심보선
당신의 눈동자
내가 오래 바라보던 한 쌍의 신神이 됐었지
당신의 무릎
내가 그 아래 누우면 두 마리 새가 됐었지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무릎은 가만히 펴졌지
거기까지는 알겠으나
새는 다시 날아오나
신은 언제 죽나
그나저나 당신은...
제목 : 예술가들 / 심보선
우리는 같은 직업을 가졌지만
모든 것을 똑같이 견디진 않아요.
방구석에 번지는 고요의 넓이.
쪽창으로 들어온 별의 길이.
각자 알아서 회복하는 병가의 나날들.
우리에게 세습된 건 재산이 아니라
오로지 빛과 어둠뿐이에요.
둘의 비례가 우리의 재능이자 개성이고요.
우리에게도 공통점이 있죠.
죽고 싶은 순간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
우리 중 누군가는 분명 요절할 테지만
정작 죽음이 우리를 선택할 땐
그런 순간들은 이미 지나친 다음이죠.
버스 노선에 없는 정류장에 내려서
주변을 둘러볼 때의 어리둥절함.
그게 우리가 죽는 방식이라니까요.
보험도 보상도 없이 말이에요.
사랑? 그래, 사랑이요.
우리는 되도록 아니 절대적으로
사랑에 빠지지 말아야 해요.
검은 수사학, 재기 어린 저주, 기괴한 점괘.
우리가 배운 직업적 기술이 사랑에 적용된다면……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지 않나요?
옛날 옛적 어느 선배가 충고했죠.
그대들이 만에 하나 사랑에 빠진다면
동백꽃이 지는 계절에 그러하길.
그것은 충분히 무겁고 긴 시간이라네.
간혹 우리 중 누군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들려요.
그러곤 아주 끔찍한 일이 생겼다는 뒷이야기도요.
우리의 사랑은 사내연애 따위에 비할 수 없어요.
버스 종점에 쭈그리고 앉아 영원히 흐느끼는 이.
이별을 하면 돌아갈 집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이.
그 사람이 버림받은 우리의 처량한 동료랍니다.
노동? 그래, 노동이요.
마지막 파업 때 끝까지 싸운 이는
노조 간부가 아니라 연극반원이었다네요.
그가 경찰에게 몽둥이로 얻어터질 때
세 명의 피 흘리는 인간이 나타났다네요.
그중에 겨우 살아남은 이는 조합원이고 죽은 이는 햄릿이고
가장 멀쩡한 이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조차
못 외우는 초짜 배우였다네요.
남들이 기운차게 H빔을 들어 올릴 땐
저만치서 뒷짐을 지고 콧노래나 흥얼거리지만
우리는 사실 타고난 손재주꾼이랍니다.
공장 곳곳에 버려진 쇳조각과 페인트로
불발의 꽃봉오리, 반기념비적인 바리케이드,
죽은 동지들의 잿빛 초상화를 담당하는 건 언제나 우리 몫이죠.
우리는 큰 것과 작은 것 사이
이를테면 시대와 작업대 사이
그 중간 어딘가에서 길을 잇고 길을 잃어요.
고통에서 벗어나는 건 고통의 양을 줄이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뭔가 다른 세상을 꿈꾸는 거라고요.
우리는 벤담의 공장에서 자발적으로 해고됐다고요.
우리는 이력서에
특기는 돌발적 충동
경력은 끝없는 욕망
성격은 불안장애라고 쓰고
그것을 면접관 앞에서 깃발처럼 흔들어요.
그리고 제 발로 문을 박차고 걸어 나오는 거에요.
의기양양하게 그리고 지독히 외롭게.
우리의 직업 정신은 뭐랄까.
살고 싶다고 할까. 죽고 싶다고 할까.
아니면 조금 유식하게 해방이라고 할까.
네, 압니다. 알고말고요.
우리가 불면에 시달리며 쓴
일기와 유서는 지나치게 극적이라는 것을.
생존? 그래, 생존이요.
언제부턴가 우리의 직업은 소멸하고 있어요.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대체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는지.
모든 공문서에서 우리의 이름 위엔 붉은 X자가 쳐져요.
기억? 그래, 기억이요.
나는 우리에게 벌어진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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