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씨의 11년 만의 신작.
타자의 고통이나 행복감을 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이 공감 능력인데, 이 공감 능력은 진보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내가 자유인을 지향한다면 타자의 고통과 불행을 공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그 고통과 불행을 줄일 수 있도록 행동에 나서야 한다. 내가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바란다면 타자 또한 자유로운 존재가 되도록 도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자유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내 몸이든 행동이든 내 사유세계의 바깥으로는 움직일 수 없기때문이다. 가령 내 머릿속에 이어도라는 섬이 들어 있지 않다면 내가 이어도에 갈 수 없듯이, 내 머릿속에 강남역 철탑 위 허공의 새가 되어 있는 김용희 씨가 없다면 그에게 공감하고 연대활동을 벌일 수 없다. 이렇게 나의 사유세계가 '80'의 서사 대신 '20'의 서사로 가득 차 있다면, 나는 '80'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같은 처지의 '80'에 공감하거나 감정이입하지 못하고 '20'에 공감하고 감정이입한다.
그러면 '20'에 속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80'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불행에 공감하고 감정이입할까? 그것은 더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80'을 업신여기고 혐오하거나 갑질을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갑질을 행하는 '갑'의 대부분은 자신이 갑질을 행하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20'에게 갑질을 당하기도 하는 '80'의 고통과 불행을 같은 처지의 '80'이 공감하고 감정이입하고 연대해야 하는데 그들은 서로 관심 자체가 없어서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것 말이다. 갑질이 제어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무관심은 잔인한 것이다. 아리러니하게도 그것은 매우 활동적이며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관심은 무엇보다도 추악한 권력의 남용과 탈선을 허용해주기 때문이다." <경제적 공포>를 쓴 비비안느 포레스테의 말이다.
-132~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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