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밀리의서재에서 발견한 책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 학술적 글쓰기, 즉 논문을 위한 글쓰기는 정말 부담스럽다. 에세이처럼 자신의 주관을 막 써내려갈 수도 없고, 단순한 감상을 써 내려갈 수도 없다. 학술적 글쓰기 전에는 늘 깊은 한 숨이 나온다. 그러다가 글쓰기를 시작하지 못하고 하루를 날려먹는 일도 다반사. 아래 책 속 내용이 조금의 안내서가 되기를.
밸리안이 불안을 해결한 경험은 글쓰기 생산성에 관한 연구로도 설명할 수 있다. 로버트 보이스(《작가이자 교수》의 저자) 및 그 밖의 학자들은, 짧은 시간 동안 매일 글을 쓰는 것이 가끔 오랫동안 글을 쓰는 것보다 창의력이나 생산성 측면에서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흔히 대학생들이 그러듯 (제출 기한에 맞춰 밤을 새워 쓴다거나) 한 번에 방대한 분량을 써내는 글쓰기는 길게 보면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글을 오래 써야만 하는 건 아니다. 자발적으로 편안하게 “몇 분 동안 글 쓰는 시간”을 최대한 자주 가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15분이라도 매일 글을 쓰면 글을 쓰지 못할 만큼 힘든 정신적 문제가 생겨도 어떻게든 넘길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 그 15분 동안 감정 환기 파일을 쓰면서 글쓰기를 방해하는 요인들을 마음속에서 끄집어내 표현한 뒤 떨쳐버리게 된다. 일주일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여섯 번 감정 환기 파일을 쓴다고 정해두는 게 좋다. 하루를 빠뜨리고 안 쓰더라도 죄책감 없이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글을 자주 쓰되 스트레스는 낮고 보상은 큰 상황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일단 15분간 매일 쓰는 습관이 자리 잡으면, 학술적 글쓰기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싶어질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시간을 확보하는 여러 방법을 제시한다. 하지만 학기가 운영되고, 다른 업무가 쏟아지고, 글에 대한 적대감과 저항감으로 몸이 안 움직일 지경이라도, 매일 15분씩 꾸준히 글을 쓰는 습관이 붙으면 잘 정리된 글쓰기 과제에 차분하게 몰두하면서 생산성을 내고 자신감도 생기게 될 것이다.
교원 글쓰기 워크숍이나 상담에 온 동료 교수들은 소속 학과, 연차, 행정적 지위와 상관없이 모두 “시간” 문제를 겪는다고 토로했다. 교수들은 학술적 글쓰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번 주, 이번 달, 이번 학기는 도저히 일주일에 서너 번, 대여섯 시간이나 낼 수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들은 이번 주만 다른 업무를 하면 다음 주는 몇 시간 정도 글을 쓰겠지 생각한다. 이러다 보면 글 쓰는 시간은 오늘이든 내일이든 다음 주든 생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글 쓰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은 (언제나 시간은 있다) 찾는 것도, 만드는 것(시간 만들기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도 아니다. 주어진 24시간을 조정하여 다른 일로 방해받지 않게 보호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시간 확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소중한 무언가를 보호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서다. 그렇다면 이제 빡빡한 학사 일정을 진행하면서 글 쓸 시간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첫째, 시간을 실제로 어떻게 쓰는지 파악해야 한다.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정확하게 조사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대부분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바쁘게 살면서도 자신이 시간을 효과적으로 쓰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실제로 어디에다 시간과 관심을 쏟는지 추적하지도 않는다. 그저 전력 질주하듯 살면서 힘겨워할 뿐이다. 그러니 “언제 글을 쓸까”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지금 당장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매일 15분 쓰기 말고도 일주일에 한두 시간 정도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마감 기한이 다가왔다면 거기에 날마다 서너 시간을 더 쓸 수 있어야 효율이 난다. 시간을 확보하려면 진정으로 글쓰기를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 이미 과중한 일과에 “딱 하나만 더” 넣자는 식으로는 안 된다. 일단 내가 어떻게 시간을 쓰는지 정확히 알게 되니, 일주일에 3~5일 아침에 두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다른 일 역시 꾸려갈 수 있었다. 이메일 확인을 나중에 하고 적당한 시간을 수업 준비에 들였더니 그게 가능했다. 글쓰기로 보람을 느끼니까 요가, 명상, 자원봉사를 많이 하지 않아도 마음이 안정됐다.
학술적 글쓰기 관련 서적인 《시계태엽의 뮤즈The Clockwork Muse》(1999)를 쓴 에비아타 제루바벨Eviatar Zerubavel은 “글을 쓰기 위해 다른 조건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처럼, 글쓰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대가 언제인지 파악해야 한다”라고 조언한다. 일주일 중 가장 생산성이 높은 시간대와 가장 생산성이 낮은 시간대를 기록하여, 언제 글을 쓰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 정하라는 것이다. 제루바벨은 글 쓰는 시간을 어떻게 에너지에 맞게 배정하는지 가르쳐준다.
가장 왕성한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시간대를 A 시간으로 정한다. A 시간에 B 업무나 C 업무를 자주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않는 게 목표다. B 업무는 주의 집중이 필요한 일로, 최고의 창의력까지 필요하지는 않다. C 업무는 기계적인 반복 작업이라서 글쓰기처럼 영감이나 창의력이 필요하지 않다. 시간대에 따라 자신이 어느 정도 생산성을 올리는지 파악한 후, A 시간은 A 업무에, B 시간은 B 업무에, C 시간은 C 업무에 각각 배정한다.
그 순간 나는 박사학위 논문은 흥미 있는 주제를 효율적으로 다룬, 전문가 수준의 원고일 뿐 현세를 초월할 만한 대작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할 일은 그저 서가의 책더미에 괜찮은 수준으로 쓴 원고를 하나 더하는 것뿐이다. 몇 년 후 나는 그 일을 해냈다. 이 분야를 뒤집을 만큼 획기적이진 않으나 나름의 기여도가 있는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첫 직장을 얻었고, 생산성 있는 학자가 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지적인 영광을 꿈꾸면서도 그 수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글을 쓰느라 수년간 분투한다. “넌 훌륭해! 정말 똑똑하다고! 힘내, 엄청난 일도 해낼 수 있어!”라는 긍정적인 확언으로 그런 자신을 격려할 수도 있다. 아니면 “네가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건 쓰레기야” “집어치워”라고 자책하며 호되게 자기를 몰아붙여도 좋다. 논문 서고에서 느낀 건,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거나 세상을 바꿀 만한 무언가를 쓸 필요가 없다는 점과 그냥 동료가 남긴 논문 옆에 꽂아둘 무언가를 쓰면 된다는 점이었다.
- 밀리의 서재- 밀리의 서재 책<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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