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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 오전, 부엉이 바위에서 故 노무현 대통령은 뛰어내렸다. 당시 자살이 아닌 현 정부의 정치적 타살이라고 까지 불리며 많은 국민들을 슬프게 했다. 영화<잔다르크>를 보면서 왜 갑자기 그가 생각났을까?
그것은 바로 잔다르크 역시 그 시대의 왕권과 종교권력으로부터 타살을 당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1431년 5월 30일, 잔다르크는 19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한 때 영국에게 뺏긴 프랑스의 땅을 되찾으며 영웅으로 추앙받던 그녀가, 왜 한 순간에 이단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해야만 했을까? 무엇이 그녀를 죽음으로 내 몰았을까?
1~2장 정도로 감상문을 쓰려다가, 잔다르크가 어이없게 죽어간 모습을 보고 화딱지가 나서 좀 길게 쓰려고 한다. 왜 그녀가 그렇게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파헤치고 싶었다. 부족한 지식이 탄로 날까봐 두렵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시대적 분위기가 그녀의 죽음을 더욱 앞당겼다
잔다르크가 살았던 15세기 초반의 유럽 곳곳에서는 마녀재판의 기운이 점점 싹트고 있었다. 그 당시 유럽사회에는 마녀술을 부리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했다.
당시 재판의 대상이 된 마녀술(이른 바 흑마녀술)에는 악의적인 마술을 부리는 마술과 악마를 숭배하는 행위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마녀술하면 악마를 숭배하는 행위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들이 마녀로 지목되고 죽임을 당했던 가장 큰 이유는 공동체에 해를 준다는 것이었다. 특히 기독교 질서뿐만 아니라 사회의 평화와 안정에 위협을 주는 존재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은 대부분 힘없는 평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당시 종교권력층들은 잔다르크를 화형 시키는 일의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소위말해 배경 없고, 가난한 잔다르크 하나쯤은 자기들끼리 공모해서 이단으로 몰기가 누워서 떡먹기였을 테니 말이다.
잔다르크는 종교권력층의 좋은 희생양 이었다!
자신을 신의 계시를 전하는 메신저라며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잔다르크가 얼마나 미웠을까? 자기네들도 신의 계시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일개 소녀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니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녀가 국가적 영웅이었던 성녀이었던 간에 하루빨리 죽이는 게 당시 종교권력층 입장에서 속편했을 것이다. 그 배후에 아마도 영국의 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놀라운 리더쉽으로 자신들과의 전쟁마다 승리를 하는 그녀를 하루빨리 제거할 구실을 찾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그녀의 몸값을 높게 불러 프랑스 왕과 협상을 하고 넘겨줄 수도 있었는데 어떻게든 화형시키려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종교계와 암묵적인 거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마침 당시는 교황권보다 왕권이 더 커지고 있는 시기여서 종교계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한 희생양을 고르는 일이 필요했던게 아닐까?
더불어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왕권보다는 아직은 종교계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재판들을 많이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잔다르크는 이렇게 작당하고 덤벼든 이들 권력층을 상대하기가 얼마나 버거웠을까?
당시의 잔다르크 재판 기록을 살펴보면, 프랑스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그녀의 삶이 한 순간에 평화 교란자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여인은 신과 교회의 신자들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선동적이며 부정하다.
이 여인은 자신의 신앙이 의심스러울 때, 자신을 권위자로 박사로 판사로 간주했다.
이 여인은 스스로 종파 분리적이고 이단적인 잘못을 계속 저질렀고, 평화의 교란자이다.
-잔다르크의 재판 기록중-
물론 잔다르크는 당시 70여 가지의 죄목에 일일이 논리정연하게 반박하며 죄를 12가지로 줄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역부족이었다.
설령 그녀가 일상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다시 재판에 회부될 가능성이 많았다. 당시 중세사회엔 신념에 가득 찬 그녀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변수가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13세기 이후부터 늘어나는 범죄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시작된 '심문에 의한 재판제도'가 그것이다. 이 제도에서는 고소나 고발이 없더라도, 풍문과 심증만으로 범죄혐의가 있는 자를 재판에 회부하고 처벌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그녀를, 물증없이 심증만으로 재판에 수십번 회부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주교가 계속해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증거를 말해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꾸 보이지도 않는 신을 증명하려니, 잔다르크는 정말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다.
잔다르크는 이젠 왕에게도 성가신 존재였다
게다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로부터 버림받았으니 그 고충은 오죽했을까. 그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며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한 잔다르크를 헌신짝처럼 내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잔다르크가 파리를 수복해야 한다고 그렇게 외쳤는데도 샤를7세는 철군을 감행했다.
▲ 오를레앙 전투에서 잔다르크의 모습
또 그녀가 영국 군에 사로잡혔을 때도 몸값을 지불하지 않았다. 당시엔 적에게 돈을 지불하면 포로를 데려올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자신이 왕좌에 올랐으니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는 뜻이었을까?
왕국을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심산이었을까? 왕이 돼서 두 다리 쭉 뻗어보려는데 잔다르크는 계속 전쟁터에 나가 전쟁을 하자고 주장하니 성가셨을지도 모른다. 옛 프랑스 영토에는 아직도 영국군 때문에 고통받고 굶주리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말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추악한 속성에 잔다르크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샤를 7세는 그녀가 죽은 후 책잡히지 않으려고, 재판기록을 다시 검토하고 그녀의 명예회복을 추진했다.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정말 속보이는 짓을 한 것이다. 19세의 소녀의 삶은 이렇게 당시의 거대 권력층들에게 유린당했다.
잔다르크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잔다르크는 사형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16세기, 17세기유럽지역에서 마녀재판이 이루어진 통계를 살펴보면 의외의 결과와 만나게 된다. 바로 재판을 받은 마녀(?)들이 모두 처형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 예로,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의 처형율을 보면 54%가 나온다. 절반은 처형되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잔다르크가 재판을 받던 시기도, 막 마녀재판이 성행하던 시기임일 감안하면 무죄 를 인정받고 무기징역만 살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마녀재판에 회부되면 무조건 화형 시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잔다르크가 기어코 화형에 처해진 것을 보면, 당시 권력층들은 어떻게든 그녀를 없애려고 한 것이 틀림없다.
잔다르크 이후의 유럽 마녀사냥은 어땠을까?
그녀의 죽음이후에도 그녀와 같은 희생은 끝나지 않았다. 마녀사냥은 17세기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는 마녀사냥이 다소 주춤하기도 했다. 마침 16세기는 르네상스 문화가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복합적인 마녀술 개념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인문주의 회의론의 강세,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회조직의 붕괴 등으로 마녀재판이 일시적으로 소강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 샤를 7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잔다르크
라스무스, 피에트로 폼포나지, 안드레아 알치아티같은 학자들도 마녀 이야기를 비판했다. 지적저술로 유명한 네테스하임의 아그리파 마녀재판을 비판했다. 신플라톤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약화시켰으며, 새로운 자연 철학을 받아들이는 것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을 받으면서도 복합적인 마녀술 개념은 17세기말까지 지속적으로 살아남았고, 마녀사냥이 확대되었다
르네상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마녀술 개념을 위협했다. 먼저 이 운동은 고전 문화의 높은 수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중세 시대의 학문, 특히 스콜라 철학에 대해 전반적으로 반감을 조성했다. 마녀 이야기에 대한 믿음은 침체젠 중세 문화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 이론은 인문주의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르네상스 시대의 주된 철학인 신 플라톤주의는 복합적인 마녀술 개념의 기반이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스콜라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신플라톤주의는 스콜라 철학자처럼 마술을 악마의 소행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우주의 자연적인 힘을 이용하면 마술을 부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p98, 책 ⌜유럽의 마녀사냥⌟-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학자들 사이에서는 신플라톤주의가 그 당시 유럽의 지식층 사이에서 주류가 아니었기 때문에 스콜라 사상에 젖은 법관과 성직자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단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1590년대에 어느 정도 다시 부활했으며, 17세기 중반까지 많은 국가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더불어 르네상스 지식인들은 악마의 존재와 힘을 인정했기 때문에, 기존의 마녀술에 대한 생각들 반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대의 정치와 종교권력이 잔다르크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지금까지 잔다르크가 왜 그렇게 맥없이 죽을 수 밖에 없었을까 고민해 보았다. 개인적으로 당대 권력층의 타살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에게 이득이 될 때는 마음껏 이용하다가, 위협이 되면 바로 제거해 버리는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의 속성을 들여다 보았다.
농부의 딸로 태어나 신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하라는 계시를 받고, 조국을 위기에서 구해 낸 잔다르크. 재판장에서는 자문관이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도 얻지 못했고, 교황에게 항소할 기회마져 박탈당했던 그녀.
여자 간수들이 지키는 수녀원에 수감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이 감시하는 감옥에 수감되었던 그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외롭게 스스로 자신을 변호해야 했던 그녀. 심판관과 주교들이 그녀의 죄를 억지로 꿰맞추기 위해 유도심문을 벌였지만, 당당하게 반박했던 그녀.
▲ 화형당하는 잔다르크
그런 그녀가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는 마녀로 낙인 찍혀 이단 선고를 받고 화형 당했다. 그녀가 죽은 후 프랑스인들은 단결 했고, 프랑스 땅에서 영국 군대 모두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1920년 그녀를 성녀로 다시 추앙했다.
그런데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한 개인의 목숨이 국가의 흥망보다 더 크다가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시 그녀는 꽃답고 꿈 많은 19세에 죽고 말았으니.
그녀는 아직도 무덤속에서 영화속에서 한 남자가 했던 다음 물음 때문에 고뇌에 차 있을까? 아니면 평온을 얻었을까?
"안타깝군, 달콤한 죽음의 환상이 풀밭에 널려 있군. 자넨 너무 큰 상상을 하고 있어. 어
쩌면 작을 수도 있겠군.
자네가 누구길래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가?자네가 신인가?"
천지를 창조하신 신께서 어떻게 너를 필요로 하다고 생각하나?
직접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 영화속에서 악마, 제 2의 자아, 혹은 신의 말 -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죽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까?
우리는 이젠 그녀를 영화 속에서라도 추억해야 한다
영화에서 다시 그 남자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악마인지 신인지 제 2의 자아인지 모를 한 남자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그가 죽음은 단순하며 로맨틱하다고 말하자, 내 가슴은 텅 빈 것 같았고 슬펐다.
영화<잔다르크>의 감독이 대사와 함께 죽음의 장면을 하나씩 보여 줄 때 먹먹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죽음은 훨씬 단순한거네."
"죽은 뒤 몇 달 뒤엔 더 재밌지"
"몇 년이 지나면 결국 로맨틱하게 되지"
그 악마인지 신인지 제2의 자아인지 모르는 그 남자에게 삶이란 단순한 것인지, 몇 달이 지나면 더욱 재밌어 지는 건지, 로맨틱한 것인지 묻고 싶어졌다.
잔다르크를 추억하고, 가슴속에 살게 해 준 뤽베송 감독에게 찬사를 보내며 글을 마친다.
< 참고 문헌 >
1.⌜유럽의 마녀사냥⌟, 브라이언 P.르박, 김동순 옮김, 2003, 소나무
2.http://winlee96.blog.me/60127379503 프랑스의 활약과 잔다르크의 승리
3.네이버 백과사전
4.강의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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