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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노트

이별의 감정을 헤짚는 책, 한귀은의 <이별리뷰>

by 이야기캐는광부 2011.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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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이라 그런지 빗방울들의 폭격이 무섭다. 고시원의 쥐알만한 창문밖으로 비 내리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이 책 한권을 펼쳤다. 하얀색 배경에 흑백사진을  인쇄한 표지가 매혹적이다.이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이 책을 만진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말이다.  책 제목이 빗소리와 어울리는 '이별리뷰'다.


이별의 오만 감정과 감각들을 책을 통해 리뷰하는 형식을 취하는 이 독특한 책. 
저자인 한귀은씨가 자신이 읽었던 책들의 구절을 짚어가며 이별의 거의 모든 것을 되새김질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별의 경험이 많지 않기에 이 책 속의 모든 이별들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책을 읽다가 '사랑'은 '이별'을 임신(?)하고 있는 임산부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랑은 생명체가 발을 톡톡 차듯 신기하다가도, '이별'이 한 연인앞에 머리를 내미는 순간 그렇게도 아픈 것이 아닌가하고 말이다.



이별을 재음미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 책읽기라고 말하는 저자.
이별에 대한 추억은 몰래 자기만의 공간에서, 스탠드를 켜고 곱씹어 봐야하는 비밀스러운 작업일지도 모른다. 
이별을 하고 나서도 스스로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자신과, 실은 괜찮지 않은 또 다른 자신과의 만남이 껄끄럽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기에. 이 책은 이별을 아프게 혹은 무덤덤하게 떠올리고 있을 그 누군가에게 알맞은 책이다.
책속의 구절들에 공감하면서 혹은 반감을 가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끝까지 읽고야 만다. 

장마철에 이별의 추억을 곱씹게 만드는 왠지 씁쓸한 이 책.


저자는 다음과 같은 책들로 이별에 대한 사색을 펼쳐나간다.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정아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이청준, <이어도>
황순원, <소나기>
하성란, <곰팡이 꽃>
김경욱, <장국영이 죽었다고?>
은희경,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이태준, <석양>
김형경, <외출>
박완서, <그 남자네 집>
김형경,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2>
신경숙, <풍금이 있던 자리>
최윤, <하나코는 없다>
김훈, <공무도하>
은희경, <내가 살았던 집> 

노희경, <그들이 사는 세상 1, 2> 
등등....

 

특히 저자가 은희경의 소설속 문장을 인용한 부분에서 묘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녀는 사과 역시 자기들끼리 닿아 있는 부분에서부터 썩기 시작한다는 걸 알았다. 가까이 닿을수록 더 많은 욕망이
생기고 결국 속으로 썩어 문드러지는 모양이 사람의 집착과 비슷했다. 갈색으로 썩은 부분을 도려내봤지만 깊게 팬 사과들은 제 모양이 아니었다.
- 은희경의 소설 <내가 살았던 집>중에서, 저자가 인용한 구절 -



사람의 집착을 사과의 썩은 부분에 비유하다니...!!
주변의 사물안에 담긴 작은 진리도 놓치지 않는 작가의 섬세함에 놀라고 만다.


크리스마스는 일 년 중 가장 즐거운 날이라기보다는, 별 일도 없는데 자신이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날이다.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집에 편안히 있으면서도 어쩐지 사회관계의 패자가 된 것 같은 열패감에 젖기도 한다.
- p 117 -



게다가 벌써부터 씁쓸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게(?) 만드는 이 구절. 거...참...씁쓸하구먼...

초기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에서, 실연을 겪고 나면 반드시 애도를 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애도가 불충분하거나 제대로 되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린다고 했다. 실연 후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 이별이 자기 잘못이라고, 자기가 못나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자존감을 지키면서 슬퍼하라는 것인데, 슬픔이 자존감을 돌아볼 여유가 있을까. 하지만 그 사랑이 진심이었다면, 어느 순간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받았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자존감을 완전히 잃게 되지는 않는다.
- p162 -


실연에 대처하는 프로이트의 고견도 맛 볼 수 있다. 자존감을 지키면서 슬퍼하기.  이게 말처럼 쉽던가...
책속의 형형색색 이별들을 만나고 나면, 기분이 멜랑꼴리 해진다. 그러다가도 이별의 순간에 찾아왔던 감정들이 지금에서야 명료해지는 느낌이다.
 


당신이 좋은 책이길 원하는가. 그럼 도서관에 가서 당신이라는 책에 각주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책을 찾으라.
당신은 좋은 책 같은 연인을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 해도 도서관에 가서 당신처럼, 좋은 책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물색할 것이 아니라, 당신을 좋은 책으로 만들어 줄 '책'을 먼저 만나라. 그럼, 당신이라는 책을
읽어 줄 사람이 비로서 당신을 조용히 펼칠 것이다. 그때 당신도 '그 사람'을 읽으면 되는 것이다.
- p15

사람을 한 권의 책에 비유하는 저자. 이 책을 덮고 나서 '나'라는 책을 읽어 줄 그 누군가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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