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생이 밥 넣는 풍경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송강호의 대사가 생각나는 하루. 부스스한 머리를 이끌고 고시원 공용 주방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세상에서 가장 귀찮은 표정으로 싱크대 앞에 선다. 밥그릇과 수저를 물에 행구고는 밥통에서 말라붙은 밥을 뜬다. 공용 냉장고를 열어본다. 다른 사람들의 반찬과 섞여 있어 내 반찬은 어디로 갔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매일 찾을 때마다 시간을 소비한다. 겨우 깍두기통과 멸치통을 찾는다.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하는 생각이 빠르게 스친다. 다시 마음을 잡고 밥을 먹기로 한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방문을 여는 찰나. 저쪽에서 부스스한 머리로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걸어온다. 책상밑 상자에서 김을 꺼낸다. 반찬통을 열고 밥 한숟가락을 뜬다. 먹는 게 아니라 넣는다. 맛보는게 아니라 섞는다. 내 몸은 그저 주방 요리기기 혹은 주방 전자 제품 같다. 밥먹는 게 내 몸에 대한 의무이자 책임인냥 숙연한 분위기다. 옆방에서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는지 뒤척인다. 밥톨 사이에 단단한 밥알이 섞여 있다. 그냥 씹는다.
컴퓨터로 다운로드 받은 KBS 1박2일을 재생시킨다. 밥먹다가 웃는다. 빨리 감아서 멤버들이 밥먹는 화면으로 돌린다. 내 밥과 그들의 밥을 비교한다. 복불복에 따라 반찬이 달라진다. 복불복에서 꼴지에서 두 번째를 한 멤버의 밥상과 내 밥상이 얼추 비슷하다. 1등한 멤버의 밥상을 보며 부러워 한다. 마음속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온다. 내 숟가락위에 얹는다. 씹는다. 웃프다. 저 무리에 섞여 반찬을 고르는 상상을 한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밥알을 씹는다. 먹는 게 아니라 몸속에 넣는다. 냉장고에 반찬통을 집어 넣듯이. 무심하게.
페이스북을 열어본다. 뉴스피드를 내려본다. 어젯밤에 누군가 올린 음식사진을 본다. 군침이 돈다. '아, 맛있겠다'하고 생각한다. 책상위에 놓인 밥을 마저 넣는다. 그릇 바닥을 긁는다. 혀에서는 맛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똥배는 찬다. 내가 무언가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의자에 기대어 좀 있다가 다시 한번 귀찮은 표정을 짓는다. 부스스한 머리로 공용 주방으로 간다. 설거지를 한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닦는다. 대충 대충.
밥그릇으로 정수기에서 물을 떠먹는다. 공용주방 식탁에서 다른 자취생이 홀로 라면을 먹고 있다. 후르륵 소리가 주르륵 빗소리처럼 들린다. 무심하게 지나치고 방문을 열고 들어 온다. 의자에 앉는다. 잠시 멍하니 그냥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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