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관에서 빌려 봤더니 수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책 표지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대부분 도서관의 좋은 책들은 이렇게 손 때가 많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1916~1984)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7년 만에 다시 읽었다. 그때는 그저 책 소개 프로그램에 나온 유명한 책이라 읽어 본 것이었지만, 눈오는 날 다시 읽어보고는 소장하고 싶은 충동이 온 몸을 휩싸고 돌았다. 책의 진가를 7년이 흐르고 나서야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수려한 문장으로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깊은 애정을 느끼해 주는 책이 또 있을까. 우리의 문화유산 이야기를 들려주는 혜곡 선생의 빼어난 문장을 읽어내려 가노라면, 그 감동이 혈관을 흐르다가 몸 구석구석에서 팔딱팔딱 맥박질한다.
1. 빼어난 문장으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채집한 명저
그가 건축, 불상, 석탑, 금속공예, 청자, 회화 등에 걸쳐 우리 문화유산의 특징과 미적인 가치를 쪽집게처럼 뽑아 묘사하는 솜씨는 정말 탁월하다. 하물며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있진 않지만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는 장독대를 말하고 있는 문장에서는 한편의 명수필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장독들은 해묵은 놈일수록 은근하고 점잖아 보이고, 행주질을 많이 받은 놈일수록 길이 들어서 독은 야릇한 윤기를 더하고 소리없는 즐거움을 주인에게 히죽이 표시한다. 그러나 장독들은 때로는 시무룩하고 때로는 허전해 하며 또 슬퍼할 줄 안다. 말하자면 장독은 주인의 심정을 반영하는 거울의 구실도 하는 것이다. 슬플 때 바라보는 장독들은 일그러진 주인의 얼굴을 가슴 위에 비춘 채 초근히 젖어 보이고 기쁠 때 바라보는 장독들은 마음이 부풀어서 아낙네들의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짓는 것이다.
서리 찬 한밤내 달빛에 비추이는 장독대의 서정, 그리고 그 검은 그림자들의 화음은 소리없는 한 막의 시극이라고 할까.
- 32쪽 -
책의 초반인데도 '온돌방 장판 맛'이라는 제목에 담긴 다음 문장에서는 한국적인 아룸다움에 대한 향수에 흠뻑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지금은 거의 사라진 풍경이지만 그가 들려주는 옛 온돌방의 서정이란 이런 것이었다.
밝은 창 정갈한 책상에 앉아 종이 소리를 부스럭이며 한나절 차향을 즐긴다든가, 거울처럼 얼굴이 비치는 밀화빛 장판방 백통 화롯가에서 서리 찬 밤에 바느질하는 아내의 얼굴을 즐긴다든가 하는 아늑하고도 따스한 온돌방의 서정은 한국적인 멋 중에서도 참맛이 아닌가 한다.
- 38쪽 -
이쯤되면 이 책이 학술서적인지 수필문학인지 구분이 안간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혜곡의 눈은 그야말로 학자를 넘어 시인의 눈을 가진 게 아닐까.
그가 이 책에 남긴 한국美에 대한 주옥같은 글들은 함박눈처럼 소리없는 감동으로 내 가슴에 쌓여간다.
2. 나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홀리다
그의 문장을 서걱서걱 따라가면은 한국美의 사무치는 풍경에 넋을 잃고 취하고야 만다. 그 풍경들은 어디서 많이 본듯하지만, 이 책을 읽기전에는 그 가치와 아름다움이 뭔지 잘 몰랐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찍이 TV매체를 통해 본 적이 있는 청자상감운학문배병으로부터 혜곡은 고려인들의 꿈을 읽어내고 있었다.
▲ 청자상감운학문배병, 고려시대(12세기 중기) 높이 42cm, 서울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noble8888
번잡스러운 듯싶으면서도 단순하고, 단순한 듯싶으면서도 고요한 아름다움과 호사스러움이 해화되어 은은하게 가슴을 두드려 주기 때문이다. 높고 푸르고 또 맑은 하늘, 이것은 고려의 하늘이었고 이 하늘을 우러러 부러울 것이 없는 고려 사람들이었다. 고려 사람들은 이 하늘을 우러러 무수한 기도와 소망을 가다듬어 왔고, 고려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이 맑고 조촐한 하늘색이 물들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략)
흰 학을 감싸고 있는 흰 동그라미는 청고한 학의 후광이었는지 동그라미 안의 모든 학은 하늘을 치솟아 날고, 동그라미 밖의 학들은 흰 구름 사이에서 모두들 아래로 내려 날고 있는 무늬를 바라보고 있으면 곱고 고운 고려 사람들의 하늘에 대한 꿈을 보는 느낌이 될 때가 있다.
- 233쪽 -
그의 문장을 보고는 숨죽여 저 청자상감운학문배병을 바라보았다.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혜곡의 문장을 통해 느끼는 그 아름다움이란 실로 절절하게 다가왔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 대해 표현한 부분은 또 어떠랴. 전에 이 미륵보살반가상을 보고 어떻게 표현해야 될 줄 몰랐는데 혜곡의 문장을 보니 그 아름다움과 가치가 맥맥히 내 안에 흐른다.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삼국시대(6세기 말), 높이 83.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jsasm1944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지닌 아름다움의 특색은 사색하는 부처님으로서의 깊고 맑은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인체 사실의 원숙한 조각 솜씨와 오묘한 해화(諧和)를 이루어 주는 데에 있다. 슬픈 얼굴인가 하고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이 보이지도 않고, 미소짓고 계신가 하고 바라보면 준엄한 기운이 입가에 간신히 흐르는 미소를 누르고 있어서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을 뼈저리게 해 주는 것이 이 부처님의 미덕이다. 인자스럽다, 슬프다, 너그럽다, 슬기롭다 하는 어휘들이 모두 하나의 화음으로 빚어진 듯 머리 속이 저절로 맑아 오는 것 같은 심정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부처님이 중생에게 내리는 제도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116쪽 -
조시는 것 같기도 하고, 눈을 엷게 뜨신 것 같기도 하고,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우수에 차 보이기도 하고. 이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혜곡은 위처럼 말해주고 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표정을 하나의 얼굴에 응축시켜 표현해 놓고 있는 듯하다. 이 반가사유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심란했던 마음도 가라앉고, 내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은은하게 펼쳐진다.
이 책을 읽으며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감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3. 이 책 때문에 찾아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이 책 때문에 지난 해 겨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찾아간 적이 있다. 20대 초반에 읽었던 어렴풋한 기억으로 언젠가 꼭 가봐야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당시 책을 읽은지 오래되었지만 그 표지와 제목만큼은 내 청춘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것이리라.
추운 겨울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 찍은 사진이다. 눈쌓인 부석사까지 시내 버스를 타고 들어와 만난 무량수전은 감동 그 자체였다. 아스라히 펼쳐진 소백산맥 능선과 부석사를 휩싸고 도는 고요한 아름다움은 발 시린 것도 잊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당시 내가 느낀 감동과 혜곡이 책속에서 표현하는 문장과 비교해보니 내 감수성의 깊이는 얕은 개울물이었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78쪽-
그의 문장을 통해 무량수전을 다시 만나니 그 때의 감동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버지배처럼 따스했던 배흘림 기둥하며,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고즈넉한 풍경까지 내 가슴에 졸졸졸 흘러 들어왔다.
'아, 여기가 그 책속의 무량수전이구나. 혜곡이 이곳을 책속에 담은 이유를 알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책표지에 나오는 안양루와 저 멀리 겹겹히 펼쳐지는 소백산맥의 풍경이다. 책 표지처럼 담지는 못했지만 그 풍경의 아름다움은 능히 느끼고 돌아 올 수 있었다.
이 책이 좋아 책에 나온 무량수전까지 직접 찾아갔던 책. 책을 읽고나서 내 마음과 발길을 실천에 옮긴 이 책. 어쩌 소장하고 싶지 않으랴. 다시 빌려봤지만 도서관에 반납하고 싶지 않았다.
4. 함께 읽어보고 싶은 책들
5. 밑줄을 굵게 쳤던 구절
언젠가 외국 잡지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추상화가는 아니지만 피카소에게 어떤 사람이 '당신의 그림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고 했을 때 피카소는 '당신은 숲 속에서 아름답게 노래부르며 조잘대는 온갖 산새들의 말을 이해할 수 가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추상 미술이란,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도 산새들의 노랫소리를 아름답게 들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추상 미술을 보는이의 눈과 마음이 즐거워지고 또 마음속에 아름다운 감정을 불러 일으켜 주는 것으로써 벌써 그 주요한 사명을 다한 것이 된다는 뜻이 아니었는가 한다.
-254쪽-
청징하다 : 맑고 깨끗하다
밀화: 호박의 한 가지
생채 : 생생한 빛이나 기운
너울 : ① 조선 시대, 궁중이나 양반 집안의 부녀자들이 나들이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쓰던 쓰개의 하나 ② 바다 같은 넓은 물에서, 크게 움직이는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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