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한 후 물이 회오리치며 욕조구멍으로 빠르게 내려가는 듯한 느낌의 전개. 짧은 호흡의 문장. 머릿속에 핏덩이를 세게 던져주는 듯한 살인현장 묘사. 범인이 누구인지는 쉽게 짐작이 됐으나, 왜 그럴수밖에 없었을까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한 흡인력을 가지고 몰아친다. 때로는 섬뜩하다. 때로는 오싹하다. 악 그자체인 것 같은 주인공의 내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자기 자신을 자기 안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문장이 뇌리에 박힌다. 그런데 한 가지 무서운 점은 우리는 타인의 '악'을 눈치채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타인의 안을 온전히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들로 이뤄진 세상에 산다는 것이 때로는 섬뜩하고 때로는 오싹한 이유다.
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지 않아요. 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67쪽-
수천 개의 감각들이 느릿느릿 나를 통과해갔다. 머리를 얼리는 한기, 내장을 뒤틀며 맹렬하게 번지는 불의 열기, 신경절 마디마디에서 폭발하는 발화의 전율, 규칙적으로 뛰는 내 심장 소리. 왼쪽에서 출발한 칼날은 삽시에 오른쪽 귀밑에 이르렀다. 벌어진 턱 밑에선 뜨거운 피가 왈칵왈칵 솟구치며 내 얼굴과 계단참 벽과 바닥을 뒤엎어버렸다. 나는 눈을 감고 어미니의 머리채와 손을 집어던지듯 밀쳐냈다. 어머니는 쿵,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몸이 계단을 타고 미끄러자는 소리가 텅, 텅, 텅 울렸다. 이어 고요해졌다.
-82쪽-
비로소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경험해보지 않았던 것. 스스로 부른 재앙, 발작전구증세였다. 운명은 제 할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나는 선택해야 했다. 끝까지 버티다 저 거대한 공동의 암흑 속으로 추락해버리든가. 당장 몸을 세우고 수영장 밖으로 튀어나가든가.
-139쪽-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생의 1/3을 몽상하는 데 쓰고, 꿈을 꿀 때에는 깨어 있을 때 감춰두었던 전혀 다른 삶을 살며, 마음의 극장에서는 헛되고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온간 소망이 실현된다"고.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는 법과 더불어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먹는 법과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굶는 법을 동시에 터득하는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 굶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생물이었다. 오만 가지 것을 먹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먹으며, 매일 매 순간 먹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먹을 것을 향한 저 광기는 포식포르노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이 지상의 생명체 중 자기 욕망에 대해 가장 참을성이 없는 종이었다.
-275쪽-
"어떤 책에서 본 얘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는 세가지 방식이 있대. 하나는 억압이야. 죽음이 다가온다는 걸 잊어버리고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양 행동하는 거.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살아. 두 번째는 항상 죽음을 마음에 새겨놓고 잊지 않는 거야. 오늘을 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할 때 삶은 가장 큰 축복이라는 거지. 세번째는 수용이래.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대.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놓여도 초월적인 평정을 얻는다는거야. 이 세 가지 전략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 커녕 생각하는 시늉조차 하기 싫었다. 그런 이상한 문제로 고민하는 것보다 그냥 죽어버리는 게 쉽고 편할 것 같았다. 해진은 스스로 대답했다.
"모두 거짓말이라는거애. 셋 다 치장된 두려움에 지나지 않아."
"그럼 뭐가 진실인데?"
"두려움이겠지. 그게 가장 정직한 감정이니까."
-330~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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