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정신의 지문이요, 모국어는 모국의 혼이기 때문에 저는 제가 오랜 세월 써오고 있는 혼불에다가 시대의 물살에 떠내려가는 쭉정이가 아니라 진정한 불빛 같은 알맹이를 담고 있는 말의 씨를 심고 싶었습니다."
작가 최명희는 말했다.
고등학교때 최명희의 <혼불>을 처음 집어들었다. 그 때는 문장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워 1권을 다 읽지 못했다. 세월이 흐른 후 혼불을 다시 읽고나서 그 숭고한 예술 정신에 엎드려 절을 드리고픈 심정이었다. 우리말이 이토록 슬프고 아름다웠던가. 모국어의 혼불이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전주한옥마을 옆에 위치한 최명희 문학관을 찾았다.
작가의 인생이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귀처럼 새겨져 있다. 작가가 기전여고 3학년에 재학중이던 썼던 수필 <우체부>. 1965년 전국남녀고교 문예콩쿠르에서 장원으로 뽑힌 작품이다. 여고생의 섬세한 감성과 사유의 깊이에 감탄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고독해져간다고 들었다. 확실히 매커니즘의 금속성이 신경을 자극하는 요즘, 우리는 서로에게서 격리되고 고립되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의 목소리보다 더 많은 기계들의 소리, 사람의 손보다 더 위력있는 기계들의 손, 사람의 목숨보다 더 모진 기계들의 수명….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점점 자신을 잃어 가고, 체온을 망각해가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체부의 음성은 가장 정겨운 인간의 소리로 우리에게 부딪혀 오는 것이다.
그의 소리가 항상 따뜻한 것만은 아니어서 사납고 왁살스럽게 들릴 때도 있지만, 조금도 싫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최명희의 수필 <우체부> 중에서-
작가에게 우체부는 단순히 편지를 배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춥고, 공허한 마음의 성곽, 절망, 고뇌, 헤어 나올 수 없는 슬픔의 지역에 뜨거운 사랑 배달('우체부' 중에서 인용)'하고 있었나보다.
최명희 문학관을 방문하면 작가의 육필 원고와 생전 모습들과 만날 수 있다. 다시 볼 수 없어 참으로 그리운 작가다. 소설<혼불>을 초롱불 삼아, 어두운 역사의 한 모퉁이에서 모국어와 옛 전통문화의 속살을 들여다본다.
전주 MBC 어느 다큐에 나온 작가의 일화. 작가는 어느날 새벽의 굉장히 싸늘한 시간을 표현하는 단어를 찾으려고 했단다. 그 시간을 뭐라고 표현해야될까. 사흘 밤낮을 성보아파트의 베란다 창문을 열고 새벽마다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그때 문득 '삭연하다(외롭고 쓸쓸하다)'라는 단어가 작가의 뇌리에 떠올랐다고 한다. 자기 머릿속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진짜 그런 단어가 있었던 것.
글을 쓸 때 그 누구보다도 치열했던 작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 나의 넋이 찍히는 그 무늬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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