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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독서노트(700) 기획자의 사전

by 이야기캐는광부 2025.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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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조사가 막막한 이유는 이 자료가 도대체 어디에 쓰일지 알지 못하고 그저 조사를 위한 조사를 하기 때문이다. 자료 조사의 이유를 깨닫게 되면 어디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찾을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을 쓸 줄 알아야 한다든가, 이 라이센스가 필요하다든가 하는 식의 강조는 큰 의미가 없다. 왜 이 자료가 필요한지, 무엇을 증명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지금까지의 믿음을 균열내기 위함인지 등 이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어떤 기획을 하든 매우 중요한 자세다.
<기획자의 사전>, 정은우 - 밀리의 서재

 

2019년 볼보 자동차는 교통사고 발생 시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더 많이 다치고 사망률도 높다는 점에 주목했다. 대부분은 여성이 체력적으로 약하고 운전에 미숙해서 그럴 거란 편견이 있었지만 볼보는 ‘과연 그럴까?’라고 생각했고, 충돌 테스트에 사용되는 마네킹이 모두 성인 남성 기준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라는 ‘진짜 문제 원인’을 발견한다. 유명한 볼보의 이바E.V.A 캠페인이다. 볼보는 이후 여성 운전자의 사고 사례와 충돌 테스트 자료를 분석해 전 세계에 공유하겠다고 선언했고, 이 캠페인으로 칸 광고제에서 큰 상을 받았다. 게다가 안전에 있어서 여느 경쟁사가 따라올 수 없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생각해보면 대단한 아이디어랄 게 없다. 그저 남성과 동등한 여성안전권을 위해 여성 마네킹을 제작하겠다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 캠페인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 정의 하나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한 물류 회사가 신선 식품 배송을 시작한 후 가장 많은 고객 민원 접수 품목이 달걀이었다. 달걀 파손으로 인한 재배송은 회사에서도 큰 손해라 충전재를 보강하기도 하고, 취급주의 스티커를 붙이기도 했지만 민원은 줄어들지 않았다. 문제는 의외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달걀 파손이 결국 바쁜 배송 기사들이 다른 택배처럼 상자를 거칠게 다루기 때문이란 걸 발견한 후 상자에 아주 크게 ‘달걀 깨짐 주의’라고 인쇄했고, 그것만으로도 파손 민원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좋은 의사는 치료법 이전에 병의 원인을 명확히 짚어낸다. 기획도 마찬가지다.
<기획자의 사전>, 정은우 - 밀리의 서재

 

한때 넷플릭스의 경쟁자가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넷플릭스의 경쟁자가 어디냐는 질문에 떠오르는 답은 유튜브나 티빙 같은 다른 영상물 제공 서비스들이다. 하지만 넷플릭스는 자신의 경쟁자를 ‘잠’이라고 정의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잠은 너무 당연한 경쟁자다. 잠을 이길 정도로 흥미로운 콘텐츠가 증가하면 넷플릭스를 보는 사람이 증가할 것은 자명하다. 이는 넷플릭스의 핵심 성과 지표KPI를 알면 보다 더 쉽게 이해된다. 넷플릭스의 KPI는 체류 시간이다. 얼마나 오래 넷플릭스 사이트에 머물렀나를 가지고 성과를 판단한다. 이쯤 되면 왜 이들이 다른 영상 서비스가 아닌 잠이 진짜 경쟁 상대라고 이야기하는지 알 수 있다.

  모든 브랜드의 꿈은 개중에 나은 브랜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브랜드와 나머지의 구도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브랜드의 꿈이다. 넷플릭스처럼 경쟁자를 새롭게 정의 내려보는 것만으로 브랜드나 조직이 나아가야 할 진짜 목표(넷플릭스의 체류 시간), 그리고 그 목표를 가로막는 진짜 허들(차라리 더 자겠다는 마음)을 만날 수 있다. 문제 정의가 단순히 인터넷 검색 몇 번에 그쳐선 안 되는 이유다.
<기획자의 사전>, 정은우 - 밀리의 서재

 

안경을 쓰고 얼굴 한쪽을 손으로 가린 포즈로 유명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아킬레 카스틸리오니Achille Castiglioni는 디자인 전공자에게는 우상에 가깝지만 일반적으로 모두가 아는 수준의 디자이너는 아니다. 하지만 카스틸리오니의 작품인지 몰랐을 뿐 이미 독자들이 한번쯤 접해본 적이 있다. 바로 조명을 켜고 끌 때 사용하는 똑딱이 스위치다. 전 세계에 1억 8천만 개 이상 판매된 이 스위치는 아류작까지 고려하면 몇억 개가 판매되었을지 셀 수도 없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디자인을 하고도 디자이너의 이름조차 모르는 데는 카스틸리오니의 디자인 철학과도 관련이 있다.

 

‘디자이너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의 필요에 딱 맞아떨어지는 디자인.’

  이것이 카스틸리오니의 디자인 원칙이다. 모든 디자인은 소비자의 문제 정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뜻인데, 그런 점에서 그는 훌륭한 디자이너이자 멋진 기획자였다. 어차피 모든 기획은 인간의 문제로 귀착되니 애초에 둘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기획자의 사전>, 정은우 - 밀리의 서재

 


한 교육 그룹의 브랜드 캠페인을 기획할 때 일이다. 이 그룹은 교육과 성장이라는 업의 본질에 맞게 그늘에 소외되어 있는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를 지원하고 싶어 했다. 문제는 이미 웬만한 장르의 아마추어 예술가들은 지원을 받은 후라는 사실이었다.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뉴스에서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출연한 배우 이정재의 에미상 수상 소식이 흘러나왔다. 한국인 최초의 수상이라며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서 한국인 스태프들이 에미상 최초로 미술 부문과 스턴트 부문 수상자 등에 호명됐다는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훨씬 많은 숫자의 스태프와 엔지니어들이 수상했음에도 말이다. 배우 황정민이 청룡영화제 자리에서 자기는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인데 스포트라이트는 이렇게 자기 혼자만 받는 게 이상하다는 수상 소감을 발표한 게 벌써 20년 전이다. 보도를 보며 우리는 황정민이 느꼈던 민망함에서 그다지 멀리 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OTT 콘텐츠 강국이라면서 그걸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홀대하는 분위기를 다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니까 모두가 이정재라는 목성만 보고 있을 때, 스태프라는 젊은 창작자 ‘칼리스토’를 본 것이다. 당연히 다음 창작자 지원 그룹은 OTT 콘텐츠 스태프들로 결정되었다.
<기획자의 사전>, 정은우 - 밀리의 서재

 

파리를 다녀온 한 방송국 기자가 들려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몇 해 전 파리 시청은 부서명을 변경했는데, 기존 부서명은 환경관리팀, 사회복지팀 등으로 세계 여느 나라의 일반적인 부서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당 부서가 하는 일 중심의 명명이었다. 그런데 환경관리팀의 이름을 ‘파리의 온도를 0.5도 낮추는 팀’으로 바꾼 것이다. 팀장의 직함 역시 ‘파리의 온도를 0.5도 낮춰야 하는 사람’으로 바꿨음은 물론이다. 일의 목표가 분명해지니 시민의 민원 만족도가 높아지고 공무원에 대한 인식도 많이 개선되었다고 한다. 보통 큰 조직에 있으면 공공이든 민간이든 내가 작은 부품처럼 느껴져 나의 역할과 일의 의미를 느끼기 힘들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의미 중심의 변화는 근무자의 효능감을 높여주는 효과도 있었다. 별거 아니지만 이 역시 일의 형태보다 일의 의미 중심으로 팀 콘셉트를 바꿔서 나타난 긍정적 변화였다. 콘셉트는 이처럼 대중에게는 ‘구체적인 가치’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조직의 구성원에게는 ‘일을 하는 의미’가 되어주기도 한다.
<기획자의 사전>, 정은우 - 밀리의 서재
<기획자의 사전>, 정은우 - 밀리의 서재

 

조정래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대하 소설을 쓴 작가다. 그를 동국대 강연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새로운 소설을 끝내고 오랜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작가의 강연이어서 청중이 구름같이 모였고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모두 작가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순간 작가는 엉뚱한 이야기로 말꼭지를 땄다.

  “마이크를 세울 수 있는 스탠드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제가 글을 하도 써서 지금 팔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조정래 작가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마라. 최선이란 자기의 노력에 스스로가 감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쓸 수 있는 말’이란 표현을 해왔다. 아무렴. 최선을 다했는지 아닌지는 다름 아닌 내가 안다. 이만하면 후회가 없는지, 더 애쓰지 않아도 되는지는 내가 안다. 베스트셀러가 못 되어도, 노벨문학상을 못 받아도, 팔이 올라가지 않을 정도로 쓰고 또 썼다면, 작가는 스스로에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최선은 내가 나를 용서하는 말이다.

  전 축구국가대표 이영표 선수에게 기자가 물었다. 축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냐고. 이영표 선수는 기라성 같은 스포츠 스타와 맞붙었을 때나 월드컵 4강 신화를 썼을 때를 말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경기에서 내가 몇 만 번 연습한 크로스가 너무 완벽한 모양으로 날아가서, 그 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노라 답했다. 
<기획자의 사전>, 정은우 - 밀리의 서재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감독으로 유명한 오시이 마모루는 황금종려상이나 오스카상을 받는 것보다 중요한 건 수상 이후에도 자기 영화를 만드는 힘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수상 이후 영화판에서 사라지는 이가 70퍼센트란다. 기획자는 선택의 순간에 최선의 것들 중에 더 나은 것을 선택하기보다 최악의 것들 중에 내가 견딜 수 있는 걸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대단한 걸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그럼에도’ 꾸준히 하는 능력이 기획자의 큰 재능이다. 뭐라도 덕지덕지 엉망진창 마구잡이로 써봐야지만 그게 쓸 만한지 아닌지 알게 된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서는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모른다. 절대 모른다. 알았다면 아는 것부터 미리미리 썼겠지만 그런 일 따위는 기획의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재능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럼에도 하려는 마음’이라고 답한다. 어디 기획뿐일까. 외국어도 수영도 다 마찬가지겠지.
<기획자의 사전>, 정은우 - 밀리의 서재

 

독설을 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피상적 소통에 안주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크리에이티브는 실패나 반박을 무릅쓰고 말을 던지는 용기를 요구한다. 가끔은 말도 안 되는 것을 말이 되게 하는 뻔뻔함도 필요하다. 핵심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다. 주장과 공격은 다르다. 기획회의를 한다는 것은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주장을 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지 않고 진심을 말한다는 의미다. 확신에 찬 말과 행동은 타인을 거슬리게 할 수 있지만 의도적이지 않다. 사실, 진실을 정직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

  튀르키에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다른 색들》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아버지는 어린 내가 그린 그림에 감탄했다. 칭찬을 받으려고 보여주었던 스케치들을 마치 걸작이라도 되는 듯 꼼꼼히 살펴보았고, 아무리 싱겁고 시시한 농담을 해도 진심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버지가 보여준 믿음이 없었더라면, 작가가 되고, 이를 내 삶으로 선택하기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기획자는 자신의 능력을 객관화시켜야 하지만 동시에 서슴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도 필요하다. 허무맹랑한 의견도 미친 소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해야 한다. 무엇이 좋은 전략이고 크리에이티브인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획자의 사전>, 정은우 - 밀리의 서재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Ando Tadao는 이미 의뢰자들이 설계를 맡기고 싶어 줄을 서는 유명 건축가이면서 실패할지 모를 설계 공모 경쟁에 여전히 도전한다. 굳이 왜 공모 경쟁을 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경쟁은 상당한 힘을 소진하고도 대부분 보답받지 못한다. 그렇지만 도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창조라는 행위가 있다고 한다면 이런 실패의 축적이야말로 유일하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무언가 만든다는 것, 새로운 가치를 구축하려는 행위의 대전제가 바로 이 싸움! 즉 도전을 계속하는 정신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획자의 사전>, 정은우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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