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본질은 무엇일까? 혁신을 뜻하는 영어 단어 ‘이노베이션(innovation)’은 라틴어 이노바레(innovāre)에서 유래했다. 이는 ‘새롭게 하다’는 뜻의 노바레(novāre)에 상태의 변화를 의미하는 접두사(in-)가 결합된 형태로 ‘새로운 상태로 변화시키다’ ‘갱신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이노베이션을 “무언가를 새로운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to change a thing into something new)”이라고 정의한다. 혁신이 곧 ‘변화(change)’와 관련된 개념임을 보여준다. 한편 한자 문화권에서는 이노베이션을 ‘혁신(革新)’이라는 단어로 번역해 사용한다. ‘혁(革)’은 본래 동물의 가죽을 뜻하지만 가죽을 벗겨내는 행위에 빗대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다’는 상징적 의미로도 쓴다. 여기에 새로울 ‘신(新)’이 더해 ‘혁신(革新)’이다. 단순한 개선이나 수정이 아니라 기존의 틀을 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혁신은 조직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핵심 수단이다. 위기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2025년 출범한 한국경영학회 혁신경영연구회는 혁신을 “더 나은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제품/서비스/프로세스/조직/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혁신에 대한 관점을 바탕으로 위기에 직면한 조직이 혁신을 통해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생존, 적응, 전환의 세 가지 전략은 각각 다른 혁신 유형과 변화의 정도에 대응한다.
<DBR426>,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 밀리의 서재
1) 생존 전략: 존속을 위한 효율화
위기 상황에서 조직이 가장 먼저 취할 수 있는 대응은 위기를 구조적 기회로 전환하기보다는 당장의 존속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기존 시스템의 효율화를 추구하는 쪽이다. 이는 ‘생존 전략(survival strategy)’에 해당한다. 특히 경기 침체나 팬데믹과 같은 자연 발생적 위기에 직면한 조직의 자연스러운 대응이다. 비용 절감, 투자 보류, 조직 축소와 같은 조치가 대표적이다. 이를 단순한 긴축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혁신 차원에서 생존 전략은 특히 점진적 공정 혁신(process innovation)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운영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생존 이후의 성장을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2020년 팬데믹 초기 다수의 항공사가 보여준 대응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노선을 축소해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셀프 체크인 확대, 무인 수하물 위탁 등 운영 프로세스를 디지털화(digitalization)해 핵심 운영 프로세스의 효율성과 서비스 안전성을 동시에 강화했다. 단순한 비용 절감이 아니라 위기 국면에 적합한 운영 방식을 시험하고 개선한 점진적 프로세스 혁신에 해당한다
<DBR426>,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 밀리의 서재
) 적응 전략: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기
위기 상황에서 조직이 생존을 넘어 선택할 수 있는 두 번째 대응은 ‘적응 전략(adaptation strategy)’이다. 기존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 틀은 유지하되 보유한 역량과 자원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재배치하거나 확장해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방식이다. 단순히 위기를 버티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 기존 제품이나 서비스를 점진적으로 개선하고 성과를 향상하는 것이 핵심이다. 적응 전략은 대개 점진적 제품/서비스 혁신(incremental product/service innovation)을 통해 구체화된다. 자사의 핵심 제품이나 서비스는 유지하되 기능과 활용 방식 등을 확장해 변화된 시장의 요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줌(Zoom)은 2011년 시스코(Cisco)의 화상회의 솔루션(WebEx) 개발을 이끌던 엔지니어 에릭 위안이 창업한 기업이다. 팬데믹 이전부터 기업 고객을 중심으로 화상회의 플랫폼을 제공했다. 그런데 2020년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갑작스러운 비대면 전환이라는 위기 속에서 교육기관, 노년층, 소규모 비즈니스 등 새로운 사용자군을 포착하며 폭발적인 성장 기회를 잡았다. 줌은 사용자 경험(UI/UX)을 단순화하고, 보안을 강화했으며, 대규모 트래픽을 감당할 수 있도록 클라우드 인프라를 확장했다.
<DBR426>,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 밀리의 서재
결국 적응 전략은 위기 속에서 잘하던 것을 더 잘하는 것, 즉 핵심 제품·서비스와 가치 제안을 유지하면서 그 주변부를 조정하고 확장해 기회를 만들어내는 수단이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기존 구조 안에서의 변화에 해당한다. 핵심 가치 자체를 재정의하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다음에서 설명할 전환 전략의 영역이다. 적응 전략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디딤돌로 다음 단계인 전환 전략으로 연결될 때 가장 효과적이다.
<DBR426>,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 밀리의 서재
생존 전략이 존속을, 적응 전략이 확장을 추구한다면 전환 전략(transformation strategy)은 핵심 가치와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재정의하는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위기를 단순히 위험으로 회피하거나 견디는 것을 넘어 학습과 변화를 촉발하는 계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조직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과감한 대응이다. 전환 전략은 기존에 하던 일을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르게 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기술, 제품, 시장, 조직 정체성 전반에 걸친 급진적 혁신(radical innovation)을 감행한다.
혁신 차원에서 전환 전략은 급진적 제품/서비스 혁신(radical product/service innovation)이나 비즈니스 모델 혁신(business model innovation)을 통해 구체화된다. 기존 제품의 개선이나 운영 효율화를 넘어 ‘우리는 누구인가?’ ‘고객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 ‘어떻게 수익을 내는가?’라는 근본적 질문들에 새로운 답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전환은 자연 발생적 외부 위기에 의해 촉발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금 변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의도적으로 조성된 위기의식이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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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점에서 기업이 혁신을 효과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점검해야 할 네 가지 핵심 영역을 제안한다. (1) 혁신 개념에 대한 조직 구성원의 공통 이해 (2) 독자적인 혁신 전략의 수립 (3) 혁신을 가능케 하는 조직 설계 (4) 프로세스와 문화를 통한 실행 기반 확립이다. 각각의 영역은 독립적이지만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4개 영역이 균형을 이룰 때 혁신은 조직의 일상적 경영 활동 속에 뿌리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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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경영의 출발점으로 ‘혁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조직 전체의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용어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혁신 활동을 설계하고 성과를 측정하는 기준을 세우는 데 핵심적인 토대가 된다. 혁신 경영의 선도 기업들은 이러한 공통 이해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다. 혁신 워크숍을 정기적으로 열어 구성원들이 각자 생각하는 혁신의 정의를 공유하고 토론을 통해 합의된 정의를 도출한 후 전사적으로 배포한다. 어떤 기업은 혁신 원칙을 사내 매뉴얼이나 온라인 학습 콘텐츠로 제작해 모든 직원이 동일한 언어와 프레임워크를 공유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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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혁신 전략은 경영 전략과 무엇이 다른가? 많은 기업이 ‘혁신 전략’을 이야기하면서 경영 전략의 하위 과제로 취급하거나 단순히 연구개발(R&D) 투자 확대나 신사업 발굴 계획을 나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혁신 전략은 단순히 경영 전략에 혁신 과제를 덧붙인 것이 아니다. 혁신 전략은 기업이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장기적으로 경쟁 우위를 구축할 것인지에 초점을 둔 독자적인 전략적 틀이다. 경영 전략이 주로 아웃사이드-인(outside-in) 접근, 즉 외부 환경 변화와 경쟁자 분석에서 출발한다면 혁신 전략은 인사이드-아웃(inside-out) 접근을 더 강조한다. 다시 말해 “환경이 이렇게 변하니 우리는 어떻게 따라가야 할까?”라는 반응적(responsive) 질문보다 “우리 조직이 가진 독특한 자원과 역량을 어떻게 활용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수 있을까?”라는 선제적(proactive) 질문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혁신 전략은 지식과 역량의 축적(accumulation), 그 축적이 이뤄진 경로와 역사를 중시한다. 과거의 축적은 현재의 선택지를 규정하고 새로운 학습은 미래의 혁신 가능성을 확장하기 때문이다. 혁신 전략은 실행 방식에서도 경영 전략과 차이가 있다. 전통적 경영 전략이 철저히 계획(plan)하고 실행(do)하는 선형적 접근을 따른다면 혁신 전략은 ‘실행을 통한 학습(learning by doing)’을 강조한다. 작은 시도를 통해 학습하고 그 학습을 다시 전략에 반영하는 순환적 과정이기도 하다. 실험과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조직은 혁신 전략을 실행할 수 없다. 혁신의 본질이 불확실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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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드 교수 등이 공저한 혁신경영의 베스트셀러 『Managing Innovation』은 혁신의 일반 모형으로 네 가지 단계를 제시한다. (1) 탐색(search), 새로운 기회와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2) 선택(selection), 그중 실행할 대상을 전략적으로 결정하며 (3) 구현(implementation), 실제 제품, 서비스로 전환하고 (4) 마지막으로 포착(capture), 그 성과에서 수익을 내고 확산하는 과정이다. 이 네 단계는 산업과 조직의 맥락에 따라 달리 구현되지만 핵심은 혁신도 다른 경영활동처럼 일관된 프로세스로 설계되고 관리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기업은 혁신 프로세스를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발견을 한다. 예컨대 일부 기업은 “누가 더 좋은 혁신 아이디어를 내는가?”라는 질문에 나이가 젊고 근속연수가 짧은 직원이 반드시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오히려 조직의 역량과 실행 가능성을 고려한 아이디어는 경험 있는 인재들이 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외부 전문가보다 내부 인재들이 조직 상황을 더 잘 이해하기 때문에 전략적 선택 단계에서 더 나은 판단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결과는 ‘누가 아이디어를 내는가’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체계적으로 평가하고 실행으로 연결하는 프로세스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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