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기사는 2008년도 봄에 필자가 대전 한밭레츠를 취재한 내용입니다. 올해로 한밭레츠가 탄생한지 10주년이라고 합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한밭레츠는 품앗이, 두레, 계 등 우리 민족의 상부상조 전통을 되살리기 위한 대전지역의 화폐 공동체입니다. 지역 내에서 통용되는 공동체화폐(지역화폐)를 통해 회원들이 노동과 물품을 거래할 수 있는 교환제도입니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노동과 물품을 필요로하는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고,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는 ‘다자간 품앗이’ 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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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한밭레츠 - 지갑이 아닌 서로의 마음속에 담아두는 돈
만원권 지폐에 그려진 세종대왕이 돈 없는 서민들을 울린다. 그는 장영실로 하여금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를 만들게 했다. 허나 이제는 눈물의 양을 측정할 수 있는 측'루'기도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보다 돈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더 많을 것 같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진 이후, 생계를 이어 가기 힘든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났다. 1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나마 벌었던 돈도 각종 생활비와 빚 때문에 낙엽처럼 떨어져 나간다. 이들은 빈 가지만 앙상한 채로 또 다시 겨울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돈 걱정 때문에 눈이 오기도 전에 머리가 하얗게 샐 지경이다.
우리는 정녕 가진 돈이 많지 않아도 사람다운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일까? 과연 돈이 없어도 우리들의 삶이 풍요로워 질 수는 없는 것일까? 문득 이 곳이라면 그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바로 돈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지역품앗이 한밭레츠.
우리는 돈으로만 해결 하지 않아요
레츠(LETS)는 지역교환거래체계 또는 지역고용거래체계를 일컫는 말이다. 캐나다의 마이클 린튼에 의해 처음 시작된 이 시스템 속에서는, 사람들이 국가의 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화폐와 동일한 가치를 갖는 공동체 화폐단위를 사용한다.
대전광역시 한밭레츠 회원들도 공동체 화폐 ‘두루’를 통해 서로 필요한 것들을 교환하고 거래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법을 깨닫는다. 이들은 결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돈으로만 해결하지 않는다.
레츠의 상근활동가 박현숙 씨도 그 중 한사람이다. 그녀는 주부이자 두 아이의 엄마다. 그 때문에 한동안 활동을 망설였지만 지금은 한밭레츠의 실무를 책임지는 어엿한 살림꾼이 되었다. 도대체 이 곳의 어떤 매력이 그녀를 끌어 당겼을까?
▲ 상근활동가 박현숙씨는 한밭레츠를 통해 돈 없이도 행복한 세상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게 됐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려면 돈이 계속 필요해요. 주부입장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다 보면 아이를 돌볼 수 없지요. 그러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구해야 되고, 그 사람에게 돈을 지불해야 되잖아요? 그렇게 되면 저는 거기에 대한 돈을 계속해서 벌어야 하니까 계속해서 벌어도 뭔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을 받죠.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다보니까 그래요.”
“여기에서는 돈을 덜 벌어도 우리 안에서 해결 할 수 있는 일들이 좀 더 많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어요. 또 한 예로 집에 있는 수도꼭지가 고장 나면 기술자를 불러야 되고, 돈을 지불해야 되잖아요. 이럴 때 레츠회원 중에서 고칠 수 있는 분이 있으면 일단 그분한테 부탁하면 되거든요. 이 때 인건비를 현금이 아닌 두루로 드릴 수 있어요. 그는 그렇게 벌어들인 두루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다른 회원으로부터 구입할 수 있고요.”
두둑한 지갑보다는 두둑한 마음이 우선
그렇기에 여기에선 지갑이 두둑할 필요가 없다. 또 회원들 모두가 현금 말고 당장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얻는다. 만약 집에 타지 않는 자전거가 있다고 하면 그 자전거를 필요로 하는 회원과 적당한 가격으로 거래할 수 있다. 즉 회원들끼리 필요한 것을 공개하고 거래하여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 '머그컵 1개에 1,000원+1,500두루' 여기서는 현금과 두루를 함께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전거 가격은 지역화폐 ‘두루’ 또는 ‘두루+현금(원)’으로 매겨진다. 여기서 1두루는 1원이다. 어떻게 보면 ‘두루’라는 화폐가 일반 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두루는 내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발행해서 쓸 수 있다는 특색이 있다. 가지고 있는 현금이 없어도 직접 원하는 만큼 발행해서 다른 회원들이 내놓은 다양한 종류의 물건 및 서비스와 거래 할 수 있는 것이다.
▲ 공동체 화폐 ‘두루’는 ‘두루두루 널리 쓰이는 돈’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단, 발행한 두루는 모두 통장에 마이너스로 기록된다. 마이너스라는 것은 그만큼 다른 회원들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다. 나중엔 두루를 벌어 그 마이너스를 채워나가야 한다. 무작정 두루를 발행해서 내가 원하는 것만 얻으려고 하지 말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 지갑이 아닌 서로의 마음속에 담아두는 돈
이를테면 일손이 모자란 어떤 회원의 밭에 가서 감자나 고구마를 캐는 일을 도와줌으로써 두루를 벌 수 있다. 회원 가운데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돕는 자원봉사를 통해 두루를 받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두루만 버는 게 아니라 서로에 대한 고마움과 신뢰도 함께 쌓게 된다. 눈에 보이는 물건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도 서로 주고 받게 되는 것.
그 까닭에 날이 갈수록 지갑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두둑해진다. 두루는 컴퓨터 계좌에만 기록되고 또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내 지갑 속에 넣을 수는 없을지라도 서로의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화폐인 것이다. 그것은 다시 한 사람의 인생관을 변화 시키기기도 한다.
박 씨는 다시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저희가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에 ‘따뜻한 이동영화관’이 있어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이웃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일을 하죠. 여기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한 남자회원이 있었어요. 처음 1년 동안은 별 생각없이 놀러 온다는 생각에 왔다 갔다만 했대요.
그러다 자신과 달리 열심히 봉사하는 한 회원을 보고 마음을 달리 먹었대요. 그 회원이 남에게 베풀면서 행복을 느끼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거죠. 그래서 지금보다 더 노력해서 앞으로 그 모습을 닮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하더라구요.”
그밖에 한밭레츠가 꾸려가고 있는 일들은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품앗이만찬' 행사가 있다. 행사날이 되면, 회원들은 각자 준비해 온 떡, 파전 ,과일 같은 음식들을 오순도순 나눠 먹는다.
또 '품앗이 학교'에서는 천연염색하기, 천연세제 만들기, 국악교실, 다도교실, 목공예교실과 같은 풍성한 교육프로그램을 각자가 운영하기도 하고, 찾아가서 배우기도 한다.
사람이 곁에 있어도 사람이 그리운 세상
다소 무례한(?)질문을 드려 보았다.
“선생님, 만약 이번 주 토요일에 로또에 당첨이 되면 어떤 일을 가장 하고 싶으세요? “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말한다.
“예전에 로또에 당첨되면 건물 하나 사가지고 한 층엔 문화공간을 만들고 또 한 층엔 사무실을 만들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웃음).
그런데 지금은 별로 떠오르는 게 없어요. 살아가면 돈이면 다 될 것 같은데 사실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사람들이 큰 재산이거든요. 사람이 어떤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 돈이 만드는 게 아니에요. 한 사람 한사람이 모여서 만드는 힘은 정말 크거든요
한밭레츠에서의 활동은 어느 이슈를 가지고 하는 운동처럼 확 일어나지 않아요. 서로 베푸는 삶에 젖어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해요. 두드러지진 않지만 그렇게 한번 꾸려지고 나면 그 힘이 무척 커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사람이 그리운 세상이다.
사무실 문을 나서면서 내 통장의 은행잔고보다는 내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 당장 부모님, 친구 그리고 그밖에 아끼는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봐야겠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고민해 봐야겠다. 만원권 지폐 속 세종대왕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 아닐까하는 상상을 하면서.
▲ 지난 4월 한밭레츠 창립 10주년 기념행사를 마치고 사람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글, 사진_김기욱 / 해피리포터]
지역품앗이 한밭레츠
주 소 : 대전광역시 대덕구 법1동 282-9 3층
전 화 : 042)638-2465
E-mail : duru@tjlets.or.kr
누리집 : http://www.tjlet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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