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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노트

박용래 시인의 시 세편을 읽다가 든 생각

by 이야기캐는광부 2009.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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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 살구꽃 피면

앵두꽃 피면

앵두바람

살구꽃 피면

살구바람

 

보리바람에

고뿔 들릴세라

황새목 둘러주던

외할머니 목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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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구꽃 피면 앵구바람, 살구꽃 피면 살구바람. 벌써부터 제 코끝에 살구냄새와 앵두향기가 풍겨오는 시입니다. 장미꽃 피면 장미바람, 개나리꽃 피면 개나리바람, 올 겨울 얼음꽃이 피면 얼음꽃 바람이 불겠지요? 바람에 대한 무수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시구절입니다.

그리고 고뿔들라 황새목에 들러주는 외할머니 목수건이 그토록 정겨운 까닭은 무엇일까요? 갑자기 외할머니 댁에 걸려있는 메주생각도 나고, 손수 건네주시던 노란 옥수수 생각도 납니다.

 

버드나무 길

맘 천근 시름겨울 때

천근 맘 시름겨울 때

마른 논에 고인 물

보러 가자.

고인 물에 얼비치는

쑥부쟁이

염소 한 마리

몇 점의 구름

紅顔의 少年같이

보러 가자.


함지박 아낙네 지나가고

어지러이 메까치 우짖는 버드나무

길.

마른 논에 고인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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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논에 고인 물에 자신을 비춰보며 시름겨운 마음을 달래보라는 시인의 시가 따뜻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시골에서 자라면서, 논에 고인 물에서 많은 놀이를 했었지요. 친구들이랑 미꾸라지도 잡고, 그 물이 얼면 썰매도 타며 엉덩방아도 찧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른 논에 고인 물에 20대의 제 자신을 비춰보면 그곳에 한 소년이 방긋 웃고 있을 것 같아요.

 

저녁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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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첫 눈이 안내렸지요? 높은 산 봉우리엔 벌써부터 눈이 쌓였을 것 같습니다. 호롱불, 조랑말 발굽, 여물써는 소리에 붐비는 눈발을 거의 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저희 부모님들은 많이 보았을 풍경일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늦은 저녁때 변두리 빈터만 다니는 눈발이 참 쓸쓸해 보이네요. 눈송이들도 어떤 정해진 길을 따라 땅위로 내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해진 길 없이 이리저리 휘날리다가 하늘이 끝날때쯤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는 변두리 빈터에 와 있는 자신을 본 느낌은 어떨까요?

그나저나 크리스마스가 곧 다가오는데, 연인들의 꼭 잡은 손등위에 붐비는 눈발이 부러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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