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설은 어렵다, 그래도 김훈 소설은 챙겨보는 나
소설을 읽으면 등장인물의 이름을 쫓아가느라, 거대한 서사를 따라가느라 머리가 복잡할 때가 많다. 어떻게 300여페이가 넘는 종이에 그런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인가하고 감탄만 하다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른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고 등장인물에 대한 이미지나 대략의 줄거리만 남을 때가 많다. 그 소설을 제대로 읽지 않은 탓이다. 너무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경우에는 연필로 이름을 적어가며 읽은 소설도 있다.
여러가지 이유때문에 소설은 내가 가장 읽기 어려워하는 장르중 하나다. 그럼에도 같은 소설을 읽고나서도 전문용어로 날카로운 평론을 하는 평론가 분들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이 소설이 이렇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나하고 내 뒤통수에 벼락을 내리치는 글을 써내기 때문이다.
그래도 '칼의노래'에서부터 '남한산성' 그리고 '흑산'까지 김훈의 소설은 그나마 챙겨보는 편이었다. 그의 문장력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거니와, 대체 어떤 마력이 있길래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인가하고 호기심이 컸기때문이다. 역시나 그의 소설을 읽으며 가슴을 징징징 울리는 문장들을 만날 때면 후회가 없었다.
소설 '칼의 노래'에나오는 문장인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쓰는데도, '꽃은 피었다'로 쓸 것인지 '꽃이 피었다'로 쓸 것인지 담배 한갑을 태우며 오랜 장고를 거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이지만,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단다. 그래서 김훈의 소설을 읽을 때면 문장을 쓸 때의 치열함이 느껴지는가보다.
2. 소설 '흑산'에서 그려지는 인간의 모습
소설 '흑산'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여기까지 왔다. 이 소설에는 18~19세기 조선의 사회적 전통과 충돌한 천주교 지식인들의 내면, 부패한 관료들의 학정과 신분질서의 부당함에 눈을 떠가는 백성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소설의 핵심인물은 천주교인이었다가 배교한 인물로 그려진 정약전과 베이징 주교에게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알릴려다 발각되어 사형당한 황사영이다.
정약전은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죄목으로 국문을 받았지만 유배를 감으로써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사실 이 지점에서 유배를 떠나지 않고 순교를 택핼 수 도 있었겠지만 정약전은 그러지 않았다(그러지 못한 것일까?..). 반면 황사영은 순교를 택했다. 소설에서 가장 대비되는 두 인물이지만 소설 '흑산'은 둘 중 어느 누구도 옹호하지 않는 것 같다.
소설속에는 자신의 의지로 배교를 한 사람, 심문과정해서 심한 고문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교를 하는 사람, 순교를 택한 사람, 배교를 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 등의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순교를 예찬한 것도 배교를 변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의 인간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묘사되고 있을 뿐이었다.
김훈은 전에 카톨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삶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배교이거나 순교이거나 모든 인간의 삶은 경건하고 소중한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을 보더라도 배교의 삶이든 순교의 삶이든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 않고, 인간이 꾸려나가는 삶 자체를 응시하며 이 소설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 나는 여기에서 산다.
- 소설 <흑산> 387쪽, 김훈의 후기 -
이 소설의 후기에 등장하는 위 글 중에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고 못박는 김훈의 말이 눈에 들어 왔다. 그래서 소설 '흑산'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모습과 내면에서 처절함이 뚝뚝 묻어나오는지도 모른다. 면밀하고 진중하게 삶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눈이 써 내려간 문장을 통해서 말이다.
소설 '흑산'을 읽으며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민초들의 삶은 고통과 고난에 신음하고 있음을 선명하게 느꼈다. 얼마나 신분사회의 횡포가 힘들고 죽겠으면 그 당시에 임금보다 더 위에 있는 천주를 찾았을까. 또 오죽했으면 갖은 고문에도 사람들은 순교를 택했을까. 당시 천대받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천하고 귀함이 따로 없고, 누구나 귀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천주교의 교리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근본이 있다. 그것은 선善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임금보다 더 높은 심판자가 있다. 그래서 다스림은 선해야 하고, 선하지 않은 다스림은 지금 당장 멸해야 한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죄를 뉘우 쳐라. 참된 뉘우침으로 삶을 깨끗이 하라. 높은 심판자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귀하고 누구나 천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을 때리지 말고, 그 생명에 해악을 가하지 마라. 때가 되면, 수많은 배들이 바다를 건너와 심판자의 뜻을 세우리라.
- 소설<흑산>, 174쪽 -
이 소설은 덤덤하게 읽히다가도,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마신듯 혓바닥에 짠 내가 났다. 개인적으로 특정한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어떤 믿음을 붙잡고서라도 살아가야 했던 2백년전 사람들의 삶이 가슴으로 밀려왔다. 그러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먼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그 시대 누군가의 뒷모습이 아련했다.
3. 들어볼 만한 김훈의 인터뷰와 그 외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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