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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토지'
최근 21권에 이르는 토지를 중고로 구매했다.
소포 상자를 연 순간, 엄두가 안났다. 언제 다 읽지....
토지 제1권을 펼쳤다.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이 곳에 이르러 나는 '토지'의 문장에 빨려들어가고야 말았다.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태곳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는지. 서늘한 달이 산마루에 걸리면 자잔한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소복 단장한 청상의 과부는 밤길을 홀로 가는데-팔월 한가위는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하는 축제는 아닐는지, 우주 만물 그 중에서도 가난한 영혼들에게는.
가을의 대지에는 열매를 맺어놓고 쓰러진 잔해가 굴러 있다. 여기저기 얼마든지 굴러 있다. 쓸쓸하고 안쓰럽고 엄숙한 잔해 위를 검시하듯 맴돌던 찬바람은 어느 사슬엔가 사람들 마음에 부딪혀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을 건드려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하고 많은 이별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흉년에 초근목피를 감당 못하고 죽어간 늙은 부모를, 돌림병에 약 한첩을 써보지 못하고 죽인 자식을 거적에 말아서 묻은 동산을, 민란 때 관가에 끌려가서 원통하게 맞아죽은 남편을, 지금은 흙 속에서 잠이 들어버린 그 숱한 이웃들을,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을 가만가만 흔들어준다."-42~43쪽-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문장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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