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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위대한 설계>를 읽으며 수백년간 인류를 괴롭혀 왔던 질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 거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저자인 스티븐 호킹과 레오나르드 믈리노프의 결론이 담긴 부분이다.
중력은 공간과 시간의 모양을 결정하므로 시공이 국소적으로는 안정적이 되고 광역적으로는 불안정적이 되는 것을 허용한다. 우주 전체의 규모에서 양의 물질 에너지는 음의 중력 에너지와 균형을 이룰 수 있고, 따라서 우주 전체의 창조에 제약이 없다.(나는 이 부분을 100%이해하지 못했다.^^;)
중력과 같은 법칙이 있기 때문에, 우주는 제 6장에서 기술한 방식으로 무로부터 자기 자신을 창조할 수 있고 창조할 것이다. 자발적 창조야말로 무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는 이유,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우주의 운행을 시작하기 위해서 신에게 호소할 필요는 없다.
-책<위대한 설계>중 에서-
생명은 신의 창조가 아닌, 물리법칙에 의해 자발적으로 생겨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문장이다. 생명이 신의 창조냐, 아니면 우주 스스로의 작품이냐를 놓고 고민이 생겼다. 과연 어느 게 맞는 것일까? 아니면 둘 다 틀린 것일까? 둘 다 맞는 것이기도 할까?
20대 청춘이 생명에 대해 고민하다
이미 스티븐 호킹과 리처드 도킨슨이 무신론에 대해서 꽤 명쾌하게 주장하고 있는 책들이 있기에 이런 고민들은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의 생명체로서, 그 중 가장 파릇파릇하다는 20대 청춘을 살고 있기에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벌써부터 두렵다. 빈약한 논리와 엉뚱한 주장으로 이 글을 끝맺게 될까봐...
그러면 어떠하랴...블로그는 그러라고 있기도 하니까 말이다. (요새 정확한 정보들과 치밀한 논리로 무장한 훌륭한 블로그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ㅜㅜ)
일단 하나의 생명체인 '나'를 가지고 고민해 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1985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때 나는 김휘열, 안음전씨의 사랑속에서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부모님이 나를 만들었으니 부모님이 과연 신일까? 아니면 신의 가면을 쓰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거나...
나를 창조한 부모님은 신이 위장한 것이 아닌 것 같고...
부모님이 만약 신이라면 자기 자식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다 알고 있지 않을까? 부모님은 대학교 졸업 한 학기를 남겨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자슥아, 우리는 네 속을 모르겄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거니?"
이렇게 말씀하시는걸로 보아, 부모님은 분명 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신은 어디에 있을까? 신을 찾기 위해 교회로 달려가야 할까? 무서워서 못가겠다. 잘못 이야기했다간 짱돌이 날라올테니 말이다. 신을 찾는 일은 답 안서는 일이다. 종교의 수는 다양하고, 그 종교들이 따르는 신도 다양하니까 말이다. 신과 종교때문에 전쟁을 벌이는 나라와 민족들도 있다. 16년동안 객관식에 특화된 나이지만 정답을 맞출 수 없을 거 같다.
갑자기 '신은 신발장에 있다'라고 어이없게 말하고 이야기를 끝내고 싶기도 하다. 아마도 잘 못 건드린 것 같다. 이 문제는 건드리면 안되었는데 말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 질문을 던진 것을 후회하며서 말이다.
생명은 신으로부터 창조되었을까? 아니면 우주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일까?
이것은 도저히 내가 대답할 수 없는 범위의 질문이다. 스티븐 호킹같은 천재도 오랜 사색끝에 간신히 책 한권으로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질문의 범위를 좁혀 보기로 했다.
다시 똑같은 질문!!
인간은 신으로부터 창조되었을까? 아니면 우주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일까?
역시나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이다. 누가 타임머신 한 대를 만들어주면 과거로 떠나고 싶다. 그런데 타임머신타고 과거로 가도 문제다. 최초의 인류에게 한국어로 질문하면 그 분들이 알아들을까? 그렇지 못할 것이다. 아직 털이 빠지지도 않은 영장류라면 더욱 더 난감할 것이다.
갑자기 다음 질문이 고개를 든다.
인간은 충분히 신이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명 전체를 신이 창조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런데 이 질문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잘못되어 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인데 생명 전체를 창조할 수 없을 것 같지는 않다. 한편,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신이 생명을 창조했다치자! 그래도 우주가 생명을 창조했다고 말 할 수도 있지 않은가?
다시 질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니..우주가 생명을 창조하면 어디 덧나나? 꼭 그것이 '신'일 필요는 없지 않는가?
아, 정말 모르겠다. 머리아프다. 책<위대한 설계>를 읽고도 우주가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 냈다고 100% 확신이 들지 않았다.
생명을 향한 폭풍 질문
생명을 신이 창조했느냐, 우주가 스스로 만들었느냐를 알려면 다음 질문도 동시에 던져야 했다.
생명을 향한 폭풍 질문
생명을 신이 창조했느냐, 우주가 스스로 만들었느냐를 알려면 다음 질문도 동시에 던져야 했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생명은 창조되는 것일까?
언제부터 생명이 시작된 것일까?
지구에서만 그 생명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외계에는 생명이 없을까?
질문은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이다. 책을 읽고나면 또 다른 질문들이 생겨나니 골치 아프다. 대부분의 책에는 결론이 있지만, 그 결론이 완변한 답은 아니다. 또 새로운 질문거리를 던져준다. 책 <위대한 설계>를 읽으며 스티븐 호킹과 똑같은 고민에 잠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생명은 어쩌다 보니 만들어진 것인가?
생명은 '이렇게 만들어야지, 저렇게 만들어야지'설계도를 짜고 만든 것일까?
생명은 만든 것일까? 만들어진 것일까?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미치겠다. 내 방에 전세계의 석학들과 전화통화할 수 있는 연락망이 설치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전문 통역사 분들도 함께 있으면 좋겠다. 아, 답답하다.
책을 읽으면 머리가 개운해져야 하는데 참 답답하다. 이 책을 일고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음을 깨달았다.
생명이란 것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왜 그 이전에 '사랑'이란 것을 집어 넣었을까?
왜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어블레 한다음에 생명이 태어나는 것일까?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왜'라는 단어를 붙이니 또 다른 질문이 된다.
이 우주에 최초의 생명이 태어났을 때, 우주는 누군가와 사랑했던 것일까?
이렇게 질문을 던지자니,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질문으로 변하는 것 같다.
양성자와 중성자가 만나 하나의 입자를 이루는 것도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중력이 일으키는 끌림이 사람의 감정적인 끌림보다 몇 억년 더 앞서는 어떠한 설레임이라면?
질문은 점점 안드로메다로 향해 간다. 그래도 좋다. 안드로메다도 우주안에 있고, 좀 더 우주에 다가가는 질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므로. 이런 생각도 이슬처럼 탁 맺혔다. 책<위대한 설계>와는 상관없을 수도 있는 내용들이다.
매혹적인 질문과 문제들로 가득찬 우주
토익문제지를 보며 머리싸매고 있기에는, 이 세상엔 너무나도 매혹적인 문제와 질문들로 가득 차 있다.(물론 영어공부라는 것이 필요하지만,,,ㅜㅜ)
중고등학교때, 학교에서 보는 시험지는 내게 수십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것의 정답은 몇 번인가?'하고 말이다. 물론 주관식도 있었다. 그런데 그 주관식에서조차도 답이 있었다.
청소년기에는 시험을 보면 안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을 향해 다양한 질문을 던져야지, 왜 세상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객관식 답을 써가길 강요(?) 받으면서...
그 당시 왜 학교 선생님들은 야간 자율학습에 우리를 붙잡아 놓고, 우리가 밤하늘, 우주를 보며 사색할 시간들을 빼앗었던 것일까?
중고등학교 시험방식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시험지를 푸는 것은 학생뿐만 아니라 선생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학생들이 평소 궁금해 했던 질문들을 시험으로 내면, 선생님들이 그것을 푸는 것이다. 아니면 함께 푸는 것이다. 함께 정답을 맞추는 것이다. 왜 우리는 옆에 있는 친구들과 경쟁하며 그 답을 풀어야 했던 것일까? 함께 풀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우리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라는 제도를 통해서 남보다 더 좋은 점수를 맞기 위해 피터지는 것일까? 그 문제를 함께 풀 수도 있는데, 등수에 상관없이, 학점에 상관없이, 취업에 상관없이 말이다.
밤하늘, 우주를 보며 사색할 시간을 빼앗은 야간 자율학습
이 세상은 함께 풀어야 할 문제들로 가득차 있는데, 왜 시험지와 내가 쓸쓸하게 마주 앉아 낑낑대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옆 친구와 상의해서 풀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면 컨닝이 된다고? 컨닝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도 참 웃긴 일이다. 어떻게 보면 서글픈 일이다
. 아, 정말 답답해진다. 또 글이 길어졌다. 술도 안먹었는데 왜 이럴까? 한권의 책이 술처럼 나를 취하게 만들었다.
(술먹고 주사를 부리는 것 같은 글을 써서 죄송합니다잉^^;. 깔끔하고 정리된 글을 쓰라고 블로그 고수님들이 말씀하셨는데도 말이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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