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에 있어,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강상중 미술에세이<구원의 미술관>에 나오는 물음이다. 저자는 뒤러의 자화상을 보고 그 그림이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바로 이 그림.
뒤러의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공간으로 설명하면 하늘 아래에 있고, 종으로 설명하면 인간이고, 직장에서 위치를 살펴보면 말단이다.
출근 전. 매일 아침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려 화장실로 간다. 눈을 반쯤 감은채 칫솔에 치약을 짠다. 힘없이 칫솔을 입으로 가져간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채 이를 닦는다. 눈을 잠깐 떠서 거울을 바라본다. 매일 거울에는 나의 자화상이 비친다. 안경 쓴 자국이 콧등에 나있고, 왁스를 바르지않은 머리카락은 너저분하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 각질이 많아 녹차 샴푸를 묻힌다. 손가락으로 박박 문지른다. 물로 헹군다. 젖은 머리카락을 닦는다. 순서가 바뀌었다. 면도를 먼저하고 머리를 감는다. 아무렴 어쩌랴.
퇴근 후. 지하철을 탄다. 터벅터벅. 지하철 까만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나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일상의 반복. 반복되는 하루. 그 하루를 반복적으로 걸으며 출퇴근하는 나. 때로는 지하철의 새카만 창밖이 답답하여 버스를 탄다. 버스 밖 풍경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빨간 버튼을 누르고 내린다. 집까지 터벅터벅.
집에 도착후.
맥주 한 캔을 따고, 나는 어디쯤 와 있는지. 내 실력은 어디쯤 와 있는지. 남들과 비교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가까운 미래 내 삶은 어디에 있을지. 나의 위치와 능력은 어디에 있을지. 자취방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답은 없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뿐이다. 식은 열정과 차가운 방바닥 사이에서 뱃살을 축 늘어뜨리고 있다.
강상중 미술에세이<구원의 미술관>은 사색에 잠기게 하는 책이다. 단순한 그림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상태에서 그림을 들여다본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술의 진실을 탐구한다.
백자대호 국보 제309호
그 중 <백자대호>라는 작품을 소개할 때 '흰색'의 의미를 곱씹는 장면이 좋다.
"흰색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무채색, 다시 말하면 색채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허'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공허가 아니라 아마 그 반대 아닐까요. 속이 빈 것이 아니라 모든 색의 요소 혹은 모든 색의 가능성이 거기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색의 주장을 다한 그 끝에 흰색이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이 끝까지 간 그곳에서 흰옷을 입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96쪽-
흰 색. 모든 가능성을 품은 색. 나는 어떤가.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면. 어두운 방을 밝히면. 그러다 잠이 들고 다시 불을 켜고 다시 불을 끄고 출근할 때. 하루에 몇 번이고 내 방의 불이 꺼졌다 켜질 때. 무언가 지워지는 기분. 열정이든, 시간이든, 바램이든. 어둠에 어둠을 덧칠한다. 가능성과 불가능성 위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나.
"맞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시대를 살아가는지 그리고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 그것을 탐구하면 돼. 그저 어디에서 주어지는 의미나 귀속점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가면 되는 거야."
-12~13쪽-
이렇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참, 2017년 정유년 닭의 해이니 이 그림도 떠오른다. 책에 나온다. 이토 자쿠추의 <군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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